그는 나를 잊었을지 몰라도...
비가 온다던 날에 저 멀리 우주에서 보내온 신호가 잘못 보낸 것처럼
한 방울의 빗물도 없이 맑고 화창하기만 한 그런 날이 있다.
이렇게 예측 불가능한 삶 속에서
내가 생각했던 일들과 다른 일들은 나의 선택과는 별개로 다른 형태로 인생의 한 장면을 그려내기도 한다.
얼마 전에 현루 작가님의 바카라을 읽고, 나는 사람과의 ‘인연’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인연’이란 우리의 삶을 얼마나 변화시키는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이 우리를 어떤 인생으로 끌고 가는지...
지난 날 나와 닿았던 사람들과의 인연 중에서 기억 언저리에 남을...
만날 수 없었던 나의 자그마한 인연에 대하여
지금껏 살아온 인생이라는 바카라을 한 권 묶어 내면 짜투리 속에 잠깐 나올 것 같은 그 분과의 인연을
쓰고자 한다.
프리랜서 강사 일을 하기 전에 나는 회사원이었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사무실에서 일찍이 슬롯 밖으로 나오던 터라 나는 늘 막내였다.
당시 나는 ‘목소리 미인’으로 통했다.
나와 통화를 한 사람들은 나의 목소리가 예쁘다며 칭찬을 해주었다.
그렇게 칭찬으로 끝날 일이 그와의 작은 인연이 되었다.
막내로써 온갖 궂은일과 서류 타이핑을 하고, 경리 일을 하며 퇴근 전에는 돈을 맞춘 후 퇴근하는 것이
온라인 게임생활에서의 일상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사무실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회사 사람들은 저마다 바빴다. 내가 하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
“○○○ 사무실입니다.”
○과장을 찾는 사람이었다.
“○과장님은 외근 가셔서 자리에 안 계세요. 실례지만 어디세요?
메모해 두었다가 ○과장님 오시면 알려 드릴게요.”
하고 전화를 끊을 참이었다.
“저... 잠깐. 새로 온 여직원 같은데, 목소리가 참 예쁘시네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이름 알려 줄 수 있어요?”
“네???”
초면에 나의 호구조사를 시작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거래처 직원이니 예의만 갖추자는 느낌으로 통화를 하였다.
○과장님이 사무실에 왔다. 나는 ○과장님께 그 직원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지금은 합병이 되었지만, 그는 당시 1금융권에 속하는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당시 나와 적잖은 나이 차이가 있었다. 예전에는 5살 이상 차이가 나도 왜 그렇게 멀게만 느껴졌는지...
‘그냥, 저 아저씨가 심심해서 저러나? 뭐 저러다 말겠지. 뭐.’
다음 날, 사무실에 전화가 울렸다.
옆에 파트너 대리님이 전화를 받았다.
그 선에서 끊어질 줄 알았던 전화가
“미스 ○, 바빠? 바쁘지 않으면 전화 받아 봐. 어제 전화했었던 ○○은행 사람이야.”
“네? 저한테 왜 갑자기?”
“네, 전화 바꿨습니다. 무슨 일이세요?”
그는 나와 통화를 한 후, 내 목소리가 예뻐서 다시 듣고 싶어서 전화했다고 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나에 대해 질문을 하고 나는 형식적인 대답을 하였다.
그 이후, 그는 매일 사무실에 전화하였다.
내가 외근이라도 가서 자리를 비운 날이면 나의 파트너는 항상 그가 전화 왔었다고 전해달래
하면서 그는 매일 사무실에 전화하였다.
오늘 점심은 뭘 먹었는지, 반찬은 뭘 먹었는지, 좋아하는 반찬은 뭔지, 좋아하는 연예인은
누구인지, 오늘 외근은 어디 어디 다녀왔는지, 질문을 풍성하게 만들어 놓고 하루에 몇 개씩
풀어 놓듯이 나에게 물어보았다.
그렇게 한 달 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도 어느 날부터 인가 힘든 온라인 게임 일을 마치고 퇴근쯤에 그에게 털어놓는 통화 시간이 좋았다.
당시 회사 사람들은 나를 부를 때면 ‘미스○’이라는, 뭐 이런 구닥다리 같은 호칭으로 나를 불렀다면
그는 항상 나에게 ‘씨’라는 호칭을 붙여 주었다.
“호수 씨, 오늘은 맛있는 점심 뭐 먹었어요?”
요즘은 ○○님이라는 호칭이 어딜 가든 많이 불리지만 그래도 난 여전히 ‘호수씨’라고 불러주는 그 호칭이
참 좋다.
당시 회사 사람 중에 한 분은 나를 ‘명랑 소녀’라고 불러주었다.
전화로 그의 목소리를 듣고 서로 질문을 주고받으며 까르르 웃기도 하고, 고된 온라인 게임생활 속에 그는 소소한
즐거움을 주었다.
과장님이 언젠가 나를 ○○은행에 데려가지 않을까?
언젠가 그를 만나게 되면 옷을 어떻게 입고 나갈까?
평소 잘 안 입는 치마를 입고 나갈까?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의 전화는 오지 않게 되었다.
내가 말실수 한것이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마지막 통화를 할 때도 웃으며 통화를 했는데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 시간이 흘렀다.
사무장님께서
“○과장, ○○은행 갈 때, 미스○를 데려가지. 왜 애꿎은 그 □과장을 데려갔어?
그래서 우리 ○○은행하고 거래 끊겼잖아!”
□과장을? 그녀는 나보다 열 살 정도 많은 아줌마였다.
‘왜 나를 안 데려갔지? 그래도 아줌마보다 아가씨인 내가 더 낫지 않나?’
그렇다고, ○과장이 나를 좋아한 건 아니였다.
○과장은 사무실 근처 K은행에 다니는 여직원을 좋아했다.
○과장은 그녀를 말할 때면 얼굴이 사과처럼 빨개지곤 하였다.
그의 시각에서 나보다 아줌마 과장님이 나보다 더 나아 보였나?
적잖은 당황함이 밀려와 직접 ○과장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까마득한 옛날의 일이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었다.
나는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낳았다.
출산의 고통으로 너무 소리를 질러서 내 목소리가 변했나?
언제부터인가 나의 목소리에 대한 칭찬을 들은 적이 없다. 그래도 뭐 괜찮다.
지금도 가끔 은행을 들르거나 스쳐 갈 때
‘그때 ○과장이 나를 ○○은행에 데려 갔다면...
당시 결혼 적령기였던 그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지금과는 다른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
아마 그는 나를 까맣게 잊었을지 모른다.
나와 다른 그녀를 보고 그가 만들어 놓은 환상과는 다른 모습에 실망하여 기억에서 지웠을지도 모른다.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가, 애틋하지는 않지만 내 머릿속 어딘가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