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글할매 바카라방 이야기
《오늘내일하는 사이》
모처럼 마음이 따뜻해지는 바카라을 만났다.
마치 할머니와 손녀의 따뜻한 사랑처럼, 표지 또한 화사한 분홍색이다.
그 분홍빛 표지 속에는 서로 꼭 붙어 환하게 웃는 할머니와 손녀가 있다.
그 웃음을 보고 있으면, 바카라을 펼치기도 전에 괜스레 마음부터 말랑해진다.
나이 차이는 아주 많이 나지만, 두 사람은 할머니와 손녀이기 이전에 서로의 가장 다정한 친구이다.
살다 보면 굳이 사랑한다는 말을 거창하게 하지 않아도,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사람이 있다.
이 바카라은 그런 사람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준다.
바카라을 펼치다가 작가 소개에서 한참 웃었다.
이렇게 짧고, 솔직하고, 가슴에 쏙 들어오는 작가 소개는 처음이다.
1931년생 임봉근 할머니.
어릴 때는 문학 소녀, 현재는 노인 복지관 슈퍼스타.
요즘은 장민호에 빠져 있다.
그리고, 임다운의 할머니.
이 짧고도 짧은 작가님 소개에, 할머니의 90년 넘는 인생이 그대로 보인다.
그런데, 손녀 임다운의 소개도 만만치 않다.
1991년 서울에서 태어나 광고회사에서 일하고, 스탠드업 코미디와 판소리를 비밀스럽게 연마한다.
그리고 마지막 한 줄.
”그리고, 임봉근의 손녀.“
나는 여기에서 그냥 마음이 찡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이력 끝에 가장 소중한 이름 하나를 남겨 놓은 것이다.
임다운의 할머니.
임봉근의 손녀.
세상에는 수많은 직함과 멋진 경력이 있지만,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을 가장 따뜻하게 설명해 주는 말은
‘누구의 사랑하는 사람’, 이 말이 아닐까…
1931년생 할머니와 1991년생 손녀.
두 사람 사이에는 무려 60년이라는 긴 세월이 놓여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나이는 그저 숫자일 뿐이다.
할머니는 손녀에게 편지를 쓰고, 손녀는 늦은 답장을 쓴다.
맛있는 것이 있으면 함께 먹고, 좋은 날이면 서로를 떠올리고, 외로울까 걱정하며 마음을 살핀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할머니와 손녀라는 이름을 넘어,
서로의 가장 오래되고 다정한 친구가 되어갔다.
60년의 세월도 뛰어넘게 만드는 것,
어쩌면 그것이 사랑이고 우정인가 보다.
할머니는 매일 노란색 노트에 편지를 쓴다.
손녀에게 말을 걸듯 하루하루를 적으며 외로움을 달래고,
스스로 마음을 다독인다.
그리고 손녀는 그 편지를 읽으며 할머니에게 늦은 답장을 쓴다.
“할머니가 외로워 죽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읽는 순간, 왜 그리도 눈물이 나던지…
할머니 역시 손녀를 그리워한다.
벚꽃이 흩날리고 나비가 날아다니는 예쁜 날이면 오히려 손녀 생각이 더 난다.
“그리운 세계가 있다는 것은 나의 희망이며 행복입니다.”
할머니에게는 손녀가 그리움이고,
손녀에게는 할머니가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다.
60년의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서로를 그리워하고 걱정하며 살아가는 두 여자.
그래서 이 바카라은 할머니와 손녀의 이야기를 넘어,
우리에게도 아직 곁에 있을 때, 더 많이 사랑하고, 더 자주 마음을 전하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있을 때 잘해.”
나 역시 딸내미한테 반 협박 삼아 자주 하던 말인데도,
아흔이 넘은 임봉근 할머니가 하시니 무게가 다르게 느껴진다.
할머니에게, 잘 산다는 것은 거창하지 않다.
맛있는 것이 있으면 함께 먹고, 제철 음식도 찾아 먹고, 좋은 점이 보이면 칭찬해주고, 사랑한다는 말도 아끼지 않는 것이다.
손녀를 만나면 묻는다.
“뭐 먹고 싶었어?”
그런데 맛있는 것을 하도 자주 사주다 보니 이제 손녀도 먹고 싶은 것이 없단다.
이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사랑을 얼마나 먹였으면 먹고 싶은 게 없어졌을까.
하지만 할머니가 말하는 ‘있을 때 잘해’는 음식 이야기만은 아니다.
사람은 결국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그러니 함께 있을 때 좋은 말을 해주고, 장점을 발견하면 칭찬해주고, 서운한 것이 있으면 고쳐보려고 노력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마음에 와닿는 말이 있다.
“상대방을 무시하는 말은 금물”
오래 함께 살아갈수록 더 필요한 것이 존중이라는 것을, 할머니는 긴 세월을 살아보며 이미 알고 계셨던 것 같다.
결국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은,
더 좋은 것을 못 먹은 것도, 더 많은 것을 가지지 못한 것도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조금 더 말하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은 나도 할머니 말씀을 마음에 적어둔다.
있을 때 잘하자.
맛있는 것도 같이 먹고, 좋은 말도 아끼지 말고,
사랑한다는 말은 더더욱 미루지 말자.
임봉근 할머니에게도 ‘최애’가 있다.
바로 가수 장민호다.
젊었을 때는 가곡만 들었고, 트로트는 노래 같지도 않다며 듣지 않으셨단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TV를 자주 보다 보니, 어느 날부터 트로트가 귀에 착착 감기기 시작했단다.
팔십 대 중반인 우리 집 양반의 트로트 사랑이 이해가 간다.
세월 따라 입맛만 변하는 줄 알았더니 노래 취향도 변한 것이다.
그러다 장민호를 만나셨단다.
처음에는 “어쩜 저렇게 반듯하게 생겼을까?” 했는데,
노래를 들을수록 목소리가 좋고, 사람이 순수해 보이고,
무대에서 노래하는 모습까지 멋있어 보였단다.
급기야 꿈에도 나타났다는 말에는, 나도 모르게 배를 잡고 웃었다.
꿈속에서 장민호가 할머니 옆에 앉아 사랑 이야기를 나누었다니, 이쯤 되면 보통 팬심이 아니다.
나이 들어 누군가를 좋아하고, 노래 한 곡에 설레고, 꿈에서 만나 행복해할 수 있다면 그것도 참 멋지게 늙어가는 방법 같다.
나이는 구십이어도 마음속에는 여전히 소녀가 산다.
“늙으면 독보를 즐겨라.
혼자 걷는 즐거움을 찾아라.
혼자 식사를 즐겨라.
고독을 사랑하고 즐기며 살자.”
처음에는 조금 쓸쓸한 말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참 씩씩한 말이다.
나이가 들면 누군가가 늘 곁에 있어주기를 기다리기보다,
혼자 있는 시간과도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혼자 걸어도 좋고,
혼자 밥을 먹어도 맛있고,
심심하면 화단에 풀도 뽑고 꽃잎도 만지며 하루를 보내는 삶.
심지어 꽃과 풀에게 말을 걸면 된다.
“너는 오늘 참 예쁘구나.”
“나도 오늘은 그럭저럭 괜찮단다.”
생각해보니 이것이야말로 멋지게 늙는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에게 매달리는 대신
내가 나를 즐겁게 해주는 법을 하나씩 배워가는 것.
외로움이 찾아와도 겁내지 않고
바카라 한 권, 산바카라 한 번, 따뜻한 밥 한 끼,
작은 꽃 한 송이에서도 즐거움을 발견하는 것.
나 역시 임봉근 할머니처럼 늙어가고 싶다.
누가 찾아오지 않아도 서운해하지 않고,
혼자 있는 날에도 내 하루를 재미있게 꾸릴 줄 아는 할머니.
그리고 어느 날 아주 많이 늙은 내가
창가에 앉아 꽃에게 말을 걸며 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늘도 혼자서 참 잘 놀았다.“
”이렇게 늙는 것도 생각보다 괜찮구나.”
바카라을 덮으며, 오래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나에게도 이렇게 따뜻한 외할머니가 계셨다.
일찍 부모를 여읜 손주들이 안쓰러워서, 어쩌다 한 번 우리 집에 오시면 편히 쉬다 가셔도 될 텐데, 할머니는 꼭 일을 찾아다니셨다.
빨래며 청소며 집안 구석구석의 굳은 일을 일부러 찾아 하셨다.
그때의 나는 그 마음을 몰랐다.
“모처럼 놀러 오셨으면 좀 쉬시지, 왜 힘든 일만 해!”
고맙다는 말은커녕 짜증부터 냈다.
지금 생각하면 할머니가 하고 싶었던 것은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신이 떠난 뒤에도 손주들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할머니가 해줄 수 있는 사랑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오늘내일하는 사이》, 이 바카라을 읽으면서 잠시 잊고 지냈던 외할머니의 모습이 불쑥 되살아났다.
그러자 가슴 한쪽이 먹먹해졌다.
아무리 오래전에 돌아가셨다지만,
아무리 어려서 내 삶을 살아내느라 바빴다지만,
그토록 나를 사랑해준 할머니를, 어떻게 잠시라도 잊고 살았을까 싶어 미안한 마음까지 밀려왔다.
하지만 어쩌면 할머니는 섭섭해하지 않으실지도 모르겠다.
손녀가 어느새 할머니 나이가 되어, 바카라 한 권을 읽다가 당신을 떠올리고, 그때 미처 몰랐던 사랑을 이제야 알아보고 있으니 말이다.
할머니, 그때는 정말 몰랐어요.
왜 그렇게 힘든 일만 찾아 하셨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요.
그게 일이 아니라 사랑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아주 늦었지만 오늘은 꼭 말하고 싶다.
“할머니, 많이 보고 싶어요.”
“그리고 많이 많이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