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인쇄소에서 일했을 때 경리언니와 친하게 지냈다. 내가 서른 살이 되기 전이었고, 언니는 40대 초반이었다. 그 시절의 언니는 지금의 나보다 나이가 어렸다.
인쇄소에는 수학과를 나와서 머리 좋고 성질부리기 좋아하던 노총각 팀장님이 있었고, 팀장님에게 매일 혼나는 디자이너 언니가 있었다. 나에게 일을 가르쳐주던 사수언니와 어리버리한 나도 있었다.
그리고 경리언니는 아들, 딸을 혼자 키우고 있었다. 어느 날 회식자리에서 언니의 사연을 듣게 되었다. 언니의 남편은 밤늦게까지 영화 보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영화를 보고 늦잠을 자느라 회사에 지각하는 일이 많았고 그러다가 밤에 게임을 시작했다고 한다. 급기야 회사에도 나가지 않게 되었다. 바카라임감이 없는 사람이었고 빚도 많아졌다. 더 이상 같이 살 수가 없어서 위장이혼을 했는데 그게 진짜 이혼이 되었다고 한다.
인쇄소에서는 티켓 같은 걸 인쇄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걸 찍으면 사람들이 공연티켓 같은 걸 무료로 몇 장 주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 연극이나 공연 티켓 같은 걸 언니가 나에게 많이 챙겨줬다. 에쿠우스 같은 연극을 본 기억이 난다. 언니는 나에게 그런 걸 많이 보라고 했다. 영화 디브이디를 빌려주기도 했고, 문화수업을 같이 듣기도 했다.
언니는 애들 키우는 것만 해도 힘들 텐데 예술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벨리댄스를 배우러 다녔고 공연을 했고 전국노래자랑 예선에 참가했다가 떨어졌다. 나중에는 사물놀이를 하러 다닌다고 했다. 방통대 국문학과를 다녔고 시를 써서 상을 받았다고 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그렇게 예술적인 사람이 없었다. 언니를 보고 있으면 그리스인 조르바가 생각났다.
어느 비 오는 날 인쇄소 앞에 트럭 한 대가 와 있었다. 트럭 아저씨에게 언니가 믹스커피 한 잔 건네주는 걸 본 적이 있다. 트럭 아저씨와 언니가 마주 보고 웃는데 하늘에서 비가 퐁당퐁당 내렸다. 어떤 환경에서도 자기가 뭐든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다는 걸 언니가 나에게 가르쳐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