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by임경주


세월은 어디에서나 흐르고 가을은 변함없이 오고 가지만, 그 안에서 제가 겪는 변화는 때론 윤슬처럼 영롱하기도, 밟으면 힘없이 바스러지는 낙엽을 닮기도 한 것 같습니다.


추억은 추억대로. 그 사람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날 부르는 소리에 놀라 뒤돌아 보면, 혼자 만의 거리에서 찬바람만 휭 불어옵니다. 행복했던 유년의 기억으로 장난기가 가득한 저는 가을스럽지 못함에도, 쓸쓸함에 옷깃을 여미고 바람에 떨어져 내리는 낙엽도 외롭습니다. 어딘가로 흩날리는, 퇴색되어 가는 시간 속에서도 희미하게 감지할 수 있는 건 내 삶을 주도한 뒤에도 여전히 찾아오는 무력함과 감추고 있는 욕망과의 끊임없는 충돌일 테죠. 여기에서 퉁겨져 나오는 스파크는 알게 모르게 글로 환원되어 왔지만, 가을은 유난히도 글과 철학과 사람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과 외로움과 원인 모를 고독으로 인해 사색이 깊어지는 시간입니다.


어느 가을, 철학이 다 소용없다는 걸 깨우친 건 그 사람을 떠나보내고 내가 너무 좋다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고, 서로가 서로에게 진심이 아니란 걸 알고 또 헤어지고 친구로 남고, 얼굴에 반해 또 다른 사랑에 미친 듯이 빠졌던 어린 날의 내 모습 때문일 겁니다. 사랑해요. 학교 종합운동장에서 도청까지 자유로를 지나 철길을 건널 때도 노란 은행나무 가로수를 따라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던 고은희, 이정란의 사랑해요. 그만큼 당신과 이 세상을 사랑합니다. 지금 빨리 만나고 싶다는 말에 그 거리를 뛰었죠. 차단기가 내려오고 기차가 굉음과 함께 다가올 때 뛰어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갈까 몇 번을 망설였답니다. 막막했고 미래도 없었던 시절의 이야기라 딱히 재밌진 않을 테죠. 가을이 깊어지는 만큼, 너무 좋으면서도 두렵기도 했던 내 안의 복잡한 감정들은 폭발할 것만 같은 내 심장을 뒤로하고 도로 한쪽에 몰려 쌓여 있는 노란 낙엽처럼 글 뒤로 숨는 습관으로 이어졌나 봅니다. 글 쓰는 게 좋은 건 글 뒤에 숨어 하고 싶은 말을 다하는 것이 전부는 아니랍니다.


이 가을이 지나가면 곧 시린 겨울이 찾아올 것이고, 혹독한 겨울을 지나 매화와 산수유를 시작으로 하얀 목련이 활짝 피고, 벚꽃이 만개하는 봄이 또 찾아오겠죠. 찬란한 빛 속에서 또 다른 세상의 얼굴에 반해 사랑에 빠질 텐데, 전 그때도 여전히 이 쓸쓸한 가을을 그리워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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