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레마

삐딱한 열정 그래도 반짝이는

by임경주


사람은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공부를 해야 할 고2 때부터 친구 따라 일요일에 새벽 용역 일을 가끔 나갔었다. 보통 공사현장 산업쓰레기들을 치우는 일인데 참 힘들다. 못할 짓이다. 하루는 정오가 되어갈 무렵부터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마냥 대기를 했다. 그날 현장 사무소 처마 밑 인부들 사이에서 함께 담배를 피우며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는데 철없이 마냥 좋기만 하더라. 당장 힘든 일을 안 하니까. 옆에서 어떤 아저씨가 우리를 부려먹는 소장 놈 지금 골치 아플 거란다. 정오였던가? 오후 두 시였던가? 아무튼 그 시간을 기준으로 더 이상 일을 못하고 인부들을 돌려보내게 되면 하루 일당을 지급해야 하고 지금 당장 돌려보내면 우린 오전 일당만 지급받는 거였다. 그때 그 어린 나도 알겠더라. 쉽게 그칠 비가 아니란 걸. 하지만 기다리고 또 기다렸었다. 현장소장 입장에서는 오늘 저 쓰레기들이 다 치워져야 내일 진행되는 일에 차질이 없기 때문에 제발 비가 그치기를 바랐나 보다. 난 그때 폭우라는 사건과 건설현장이라는 배경에서 소장의 딜레마를 구경하는 관객이었다.




딜레마란, 주인공이 그 어느 한쪽을 선택해도 반드시 손실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지독한 상황을 말한다. 성공한 이야기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매력적인 딜레마가 스토리의 엔진으로 작용될 때가 굉장히 많다. 딜레마가 매력적일수록,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강하다. 한데, 딜레마는 반드시 배경을 필요로 한다. 배경에 하나의 사건이 겹쳐진 모양새로 이야기 안에서 주인공을 살아 움직이게 하고 독자들과 관객들을 매혹시켜 이야기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 배경이 없는 사건이라면, 여기에는 딜레마가 존재할 수가 없다.


무엇이든 단계를 거친다. 하지만 어떤 지독한 사랑과 변태적인 권력은 그 단계를 무시한다. 권력은 남에게 내가 하기 싫은 일을 강제로 할 수 있게 만드는 무서운 힘인데,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건 그걸 당하는 사람이 막상 복종에 들어가면 다음부터는 특정 단계가 없다는 거다. 사랑 없는 숲에서 닳고 닳은 사기꾼과 상처 입은 두 여자와의 관계처럼 미친 사랑의 힘과 관계도 그렇다. 권력에 당하는 것처럼 단계가 없다. 상식과 원칙을 온전히 보존하는 미친 사랑은 없다. 어느 한쪽은 반드시 권력의 맛을 맛본다. 여기 지금 사랑 없는 숲처럼, 지독하고도 미친 사랑이라는 하나의 사건이 있다면 그 배경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가족이 살아가는 공간이다. 집이 될 수도 있고, 온라인 게임이 될 수도 있겠다. 그들이 일으키는 사건은 그들과 가장 가까운 가족과 그 주변인들의 생활공간 안에서만 적용될 뿐이다. 정상적인 사랑이라면 아무런 사건도 발생하지 않을 이 미친 -사랑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사랑이라는 하나의 사건은 오직 이 배경 안에서만 지독한 딜레마를 주인공에게 내던지고 삶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궁지로 몰아간다. 정작 피해자인지, 아니면 스스로 원하는 것인지도 모를 주인공의 입장에서는 미친 사랑도 가족도, 그 어느 쪽을 포기해도 손실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지독한 상황에 빠진다. 그래서 현실이든, 지어낸 이야기 속이든 결국엔 이 사건이 유지되는 과정에서 멀쩡한 피해자들이 탄생한다. 우리의 주인공은 이 미친 사랑으로 인해 무너진 삶의 균형을 어떻게 회복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욕망을 추구해 나갈까. 이상, 뻔한 내로남불을 주요 콘셉트로 하는 흔하디 흔한 이야기를 굳이 시작해 보겠다는 이유가 담긴, 나름의 획기적인 기획의도라고 할 수 있겠다.


근데 개뿔. 흥, 말은 쉽다. 불륜이든 뭐든 대중적이면서도 매혹적인 딜레마를 하나 만들어 내보시라. 잘하신다고 들었다. 그래서 글을 확인해 보았다.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으시다. 기다리겠다.


웃기는 소리다. 이게 뜻대로 되면 내가 이러고 살겠는가. 작가의 인생은 이미 성공했고, 러브콜이 쇄도하고, 최상의 이야기꾼으로 높은 몸값을 자랑하게 된다. 허튼소리가 아니다. 그런데 어쩌나. 매혹적이면서 대중성까지 잡아내는 새로운 딜레마란 게 과연 있기나 할까? 말이 되면 이미 어디서 많이 본 내용이고, 좀 특별하다 싶으면 개연성이 부족하다. 말이 안 된다. 엉망이다.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던, 새롭고 매혹적이면서도 대중적인 딜레마가 압도적인 힘으로 스토리를 끌고 나가는, 그런 놀라운 이야기가 억지로 만든다고 만들어질까?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다들 도둑놈들이다. 돈 한 푼도 안 주면서 손도 안 대고 코 풀겠다는 놈들. 사기꾼들. 그러다 혹시나 나오면 대박이겠지. 어제는 누가 제안메일로 내 글을 출판해 줄 테니 30만 원이면 된단다. 혹시, 사랑도 돈으로 될까. 내가 아무리 무명작가라고 해도 그렇지. 슬프다, 진짜. 난 지금도 여전히 그날처럼, 건설현장에서 내리는 비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담배만 피우고 있는 것 같다. 기회 앞에서도 무력하다. 사랑도 글도 내 안의 열정은 뜨겁고 가득하지만 할 수 있는 게 딱히 없다. 차라리 그냥 이야기처럼, 미친 사랑에라도 걸려버려라.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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