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Tell과 Show의 Show

by임경주


소설을 쓰는 사람이 작가로 진화하는 단계를 보면 보통 이렇다. 지문이 온통 설명으로 가득하다. 서술인지 설명인지도 모호하다. 소설이라고 말하면 절대로 안 되는, 그렇다고 시놉도 아닌 이게 정확히 뭐라고 말할 수도 없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형태로 그냥 쓴 서술 아닌 설명도 아닌 것을 소설이랍시고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또 속으로는 은근히 자기가 잘 썼다고 느끼며- 만인 앞에 공개한다. 철면피다. 습작생 또는 생초짜 작가라고도 말할 수도 없는, 그렇게 말해서도 안 되는, 어떤 그냥 일반인 누군가가 소설 쓰기에 흥미를 나타내는 단계다. 이 누군가가 여러 습작을 통해 조금 더 발전하는 단계가 대사를 사용하는 거다.


대사를 큰따옴표를 사용해 쓰긴 하는데 여전히 대사로 모든 걸 설명하는 단계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위에서 언급한 모호한 것을 쓰는 사람과 그냥 똑같다. 지문이 아닌 대사로 여전히 설명이다. 서술에서는 벗어났다.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기에 스스로에게 반하고, 낯이 더 두꺼워져 혼자 의문이 생기는 단계이다. 이게 소설인가? 맞나? 이 때는 옆에서 좋다고 호응해 주는 인간들이 더 문제다.


그 다음 단계가 치밀한 구성과 세상에 몇 없을 것이라 자신하는 독특한 소재를 찾고 어마무시한 설정을 짜는데 많은 시간을 사용한다. 하지만 쓰기의 형태는 여전히 Tell이다. Show가 없다. 캐릭터가 움직이지 않으니 보이지 않고 배경도 없다. 그저 새카만 어둠 속에서 활자만 읽는 기분이다. 지친다. 읽는 사람도 곤욕이다. 작가가 독자에게 보고한다. 이야기를 읽으면서 뭘 느낄 수가 없다. 작가의 설명을 직접 전달받는다. 꾹 참고 끝까지 읽고 싶어도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읽히지가 않는다.


여기서부터가 감각의 영역이다. 갈리기 시작한다. 감각이 있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뭐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캐치하고 빠르게 바꾸어 나가지만 감각이 없는 사람들은 허구한 날 계속 어제와 똑같은 글을 쓴다. 그러다 시간이 훌쩍 지나간 뒤에서야 뒤늦게 알고 바꾸어 나간다.


이런 일이 반복 발생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캐릭터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글 쓰는 이가 캐릭터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설명하는 도구 그 이상으로 사용하질 못한다. 더 심각한 건 배경이 뭔지도 모른다. 배경을 모르니까 배경이 없고 배경이 없으니 캐릭터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없다. 배경은 단지 예쁘게 묘사하는 공간이 아닌, 그저 필요에 의해 잠시 머무르는 장소가 아닌 캐릭터가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세계다. 그 세계에서 보고 듣는 모든 것이 그에게는 당연히 진실인 것이다. 엄한 데에 힘을 쏟지 마시라.


어떤 서사, 어떤 설정, 어떤 구성을 기획하고 쓰겠노라고 집중하지 말고 그 힘과 시간을 캐릭터 하나라도 이해하는 데 사용하라. 정확하게 알아야 스스로 살아나 말하고 배경 안에서 뛰어논다. 사건을 일으킨다. 그 캐릭터 다운 말을 하고 그 캐릭터에 맞는 행동을 한다. 여기에는 거짓이 있을 수가 없다. 진실 그 자체다. 그걸 받아 쓰면 된다. 당신의 지루한 설명을 캐릭터의 입을 통해 내뱉는 것이 아니다.


이게 되면 소설 쓰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단계이다. 여기에서 천재와 둔재로 나누어진다. 천재는 특별한 감각으로 독보적인 Tell과 Show를 통한 Show를 연출하며 독자들의 시선을 빨아들이고 뇌를 장악한다. 지갑을 열게 만든다. 둔재들도 똑같이 쓰는 같은 문장, 똑같은 대사를 그만의 방식으로 써내 독자들의 가슴에 오래도록 각인시킨다. 사랑과 존경 돈과 명예를 모두 차지하고 부귀영화를 누린다. 둔재들은 천재를 바라보며, 나도 저렇게 될 수도 있다는 거 그거 하나만 바라보고 오늘도 글을 써나간다.


내가 봤을 때 당신은 천재가 맞다. 하루 이틀 지켜보고 하는 말이 아니다. Tell을 넘어 Show가 되기 시작하면 그땐 글쓰기가 당신만이 가진 특별한 감각으로 인해 수직상승할 것이고 그대의 인생 전체에도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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