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 다가오면

그때 그 은행나무 도랑

by임경주




아들 생일이다. 또 명절이다. 저녁 몇 시에 도착한단다. 좋은 부모 잘 만나 참으로 행복한 녀석이다. 집사람은 이미 신나서 아침 일빠따로 코스트코에 들러 아들 먹이고 싶은 걸 잔뜩 사면서도 가끔 당신은 뭐 먹고 싶냐고 묻는데, 난 딱히 없다. 지나가는 말이라는 거 다 아니까.


명절을 싫어하는 어린아이는 아마 몇 없을 것이다. 난 명절이 그렇게도 싫었다. 명절이 다가오면 아버지가 집에 오는 날도 가까워지니까 미리 싫었다. 내 평화와 행복이 깨졌다. 대문 밖에서는 영숙이랑 말자가 놀자고 기다리는데 먹을 갈아야 했다. 공자왈 맹자왈, 인의예지 듣고 또 듣고 이 지겨운 시간 빨리 도망치고 싶어 대충 갈다가 먹이랑 벼루가 탁, 부딪치면서 먹물 한 방울이 화선지 위로 떨어졌다. 좆됐다, 싶었는데 아버지가 잠시 고민하시더니 그 먹물 한 방울을 글씨로 감추며 붓글씨를 써내려 갔다. 감쪽같이 사라지더라. 글자 속으로. 나중에 그 글씨가 아버지 전시회 때 표구가 되어 걸려 있는 걸 보는데, 글씨보다는 숨겨진 그 먹물 한 방울만 보이는 것 같았다. 이런 게 사람의 원죄일까? 예수 믿고 덮어지고 감춰지면 없어지는 걸까? 아니면 여전히 남아 있는 걸까. 상처가 감싸진다고 없어지나? 과거가 덮는다고 사라질까? 누군가에게 했던 내 잘못이 용서받는다고 없었던 일이 되나? 그 먹물은 보이지 않을 뿐 글씨와 함께 존재하는 거다.


아버지가 있는 집에 그렇게도 들어가기가 싫어서 논과 밭을 떠돌며 불을 피웠다. 석조교량 아래 동네 아저씨들이 누렁이를 은행나무에 매달아 두들겨 패 잡아먹던 자린데, 친구들이 다 떠나도 홀로 깜깜한 곳에 남아 불을 피우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솔 초창기였고, 환희는 노인네들 담배라며 안 피웠던 시대다. 한 번은 불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나를 엄마가 울면서 찾아와 어쩔 수 없이 집에 들어갔는데 담배 냄새 때문인지 불 냄새 때문인지 어쩐지 모르겠지만 아버지 혀 차는 소리로 끝났다. 그 뒤로 아버지와 나는 끝내 화해하지 못했고 정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입 밖으로 터져 나오지 못하는 내 바람은 딱 그거 하나였다. 명절이랍시고 여기 오지 마라. 제발. 지옥이다.


명절인데 가족들과 함께 있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보면 진짜 그때 생각에 눈물이 난다. 누굴 위해 울어 주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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