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톤

스페셜을 위한 헌사

by임경주




봉숭아 물은 아세톤으로 지워지지 않아.

누가 뭐래?

얼음이 투명하려면 공기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아야 하고. 공기도 불순물이야.

얼음이 어디 있어?

저기.

잠깐만, 그러면 우린 어떻게 숨을 쉬지?

괜찮아. 우린 물고기잖아.

아, 그렇지.


화단 한편 녹아내린 눈 사이로 빨간 꽃이 피어 있다. 내가 가리킨 곳과는 정반대방향이었다.


거기 말고.

아니, 꽃이 피었어.

진짜 꽃 아니야. 조화겠지.

아냐. 진짜야.


누가 생각 없이 버린 조화가 눈이 녹으면서 모습을 드러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가서 보니 진짜 꽃이었다. 작약을 닮았다.


미친 꽃이네.

미친꽃?

응. 미쳤잖아.

하긴, 신기하다. 겨울에 어떻게 피어난 거지? 진짜 미친 건가? 미친 게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2월에 피는 꽃이 따로 있긴 하나 봐.

2월에 피는 꽃? 그런 게 있나? 그냥 이거 가짜 아닐까? 확 뿌리 채 뽑아볼까?

하지 마. 죽잖아. 지금 이거 가짜라고 해도 우리가 믿어주면 진짜가 될 거야.

그래?

그렇다니까?

알겠다. 이 꽃은 찬물을 먹고 크나 봐. 아참 우리 얼음!

맞아. 우리 얼음 찾다가 이게 뭐야.

저기.


내가 처음 가리켰던 곳, 처마 아래 빗물을 받는 빨간 고무 대야 안을 그녀가 먼저 들여다본다. 마치, 우물 안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나도 옆에서 들여다본다. 우물 안에 두 사람의 얼굴이 담겨 있다.


얼음이 쟁반 같아. 둥둥 떠 있어. 저걸 어떻게 건져내지?

우리 이 대야를 밀어 넘어뜨리자.

어, 그래. 좋았어.

영차.

영차.

와우.

넘어갔어.


쏟아지는 물과 함께 빠져나온 얼음도 반으로 조각났다.


잘 골라보면 투명한 조각이 있을 거야.

찾았다. 와, 깨끗해. 보석 같아.


그녀가 투명한 얼음 한 조각을 뒤집어진 대야 끝 아슬아슬한 선상에 올려놓았다. 위태로운 자리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이거 알아?

뭐?

이걸 손목에 올리고 열까지 세면, 손목이 끊어질 것처럼 아파. 그걸 또 참으면 엄청난 고통이 찾아올 거야. 하지만 꾹 참아야 해. 그때만 볼 수 있으니까. 얼음이 돋보기 역할을 해주어서 더욱더 잘 보일 거야.

뭐가?

빨간색과 파란색이 서로 섞인 핏줄이 도드라져 올라오면, 그저 내가 인형 같아. 살아온 시간도 가짜 같고.

정말?

응.

다 가짜 같으면, 뭐가 진짜 일까?

네가 말했잖아. 우리가 믿는 거?


그녀가 얼음을 들고 고민에 빠진다.


나 해볼래.

참을 수 있겠어?

응. 저 꽃도 얼음물을 먹고 큰 거잖아.

넌 꽃이 아닌데.

될 수 있어. 원하는 건, 뭐든. 해보는 거지 뭐.

힘들면 바로 털어내.

알겠어. 올려. 응? 뭐 해?


글 포기하지 마. 최고잖아.

알았어. 올리기나 해. 아, 차가워.

참을 수 있겠어?

아직은?

나 저 꽃. 꽃말을 알 거 같아.

뭔데?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알면 됐어.

꽃말이라고.

거짓말. 20초 넘었다.

와. 엄청 오래 참았는데?

용서는 안 할 거야. 사과만 받는다.

그래. 널 다시 우러러볼 수 있어 좋아. 단지, 그것뿐이야.

뭐 볼 게 있다고.


그녀의 손목에 특별한 핏줄이 돋아나 있었다. 화단에 피어난, 빠알간 작약을 닮은 2월의 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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