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이 드나 보다
아주 오래된 일이다. 잘 기억도 나지 않고,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맞다. 왜 그랬을까? 꼭 그래야만 했을까? 남겨진 의문은 있지만 그것마저도 서서히 희석되고 있다.
한데, 사람이 어떤 일에 반성하는 건 본능인 걸까? 다 잊었다지만, 문득 떠오르는 말들이 있다. 그 목소리가 선명해진다. 분명 사소한 말이 아니었는데, 그때 흘려듣지 않았다면 내 입장만 내세우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말들이 떠오를 때면 남겨져 있었던 의문이 조금씩 풀린다. 복잡했던 퍼즐이 맞아떨어지는 기분이다. 후회로 인해 애써 반추하는 것도 아니고 반성의 의미로 내가 놓친 게 있나, 기억을 억지로 더듬어 보는 것도 아니다. 그냥 갑자기, 정말 나도 모르게 저절로 그 목소리가 들려온다. 전혀 의도치 않았고 그저 바쁘게 지내는데, 또 글에 집중하고 있는데 벼락 치듯 선명하게 떠오르는 말들이다.
그럴 때면 아, 그래서 그랬구나. 난 정말 눈치, 아니 염치가 조금도 없었구나.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어진다. 시간이 약이라는 건 몽땅 잊게 해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제대로 보라고 색안경을 벗겨주는 게 아닐까 싶다. 내가 그때 뭘 잘못했는지, 열받는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왜 그런 말들을 싹 다 무시했는지. 참 웃기다. 철이 들었나? 나도 모르게 상대를 변호하고 있다. 그래봐야 바뀔 건 없지만. 아, 그렇구나. 싶은 거다.
부부싸움은 왜 칼로 물 베기가 가능한 걸까? 아니다. 결국엔 칼로 물 베기일 뿐이니까, 그래서 부부일까? 주변에 이혼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들의 싸움은 칼로 물 베기가 아닌 가보다. 도대체 얼마나 심하게 싸우는 걸까. 화해를 위한 어떤 말도 다시 상처가 되나 보다. 이들에게는 시간의 약도 없는 걸까. 왜 화해할 수 없는 걸까. 서로의 바닥을 다 본 뒤라 감정의 골이 깊어져 존경했던 마음, 우러러보았던 마음들이 다 사라져 버려서 그런 걸까? 물론 집안 문제라든지, 더 이상 둘만의 문제가 아닌 경우도 있을 것이다. 노력이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더 큰 오해를 불러오고 더 싫은 모습만 보게 되니 이별하는 게 최선일지도 모른다.
또 한 번의 시간이 흐르면 그때는 또 어떤 목소리들이 들려올까. 또 어떤 퍼즐들이 맞아떨어질까. 그때는 상대를 어떻게 변호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될까. 지금도 문득 떠오르는 목소리들로 인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앞으로의 시간은 또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 줄까.
그렇게 시간이 더 흐르면, 어느 날에는 예전처럼 다시 존경했던 마음, 우러러보았던 마음이 생겨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