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퐁스 도데의 별
지난가을이었다. 도대체가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길고도 긴 싸움이 나의 승리로 끝난 계절이었다. 회사에서 내가 일하는 곳은 사각지대다. 너무나도 지쳐버린 나를 위한 상무님의 배려다. 상무님은 사장님의 배려라고 한다. 직원들은 과거 한 때 한 부서를 가족처럼 이끌며 만인의 부러움과 함께 패밀리에 끼지 못한 자들에게는 시기와 질투를 유발했던 임부장의 행방을 몹시 궁금해한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것처럼 정말 피 말리는 전쟁과도 같았던 3년이라는 시간과 치열하고도 길었던 싸움 끝에 승리와 함께 돌아온 건 나 자신과 내 새끼들에게도 상처였다. 정말 못할 짓이었다. 물리쳐야 했던 자는, 그만큼 친했던 사이였다.
이제는 다들 관심 없다. 임부장이 지금 있는 곳이 어딘지를 궁금해하다가 읭? 거기가 어딘데? 우리 회사에 그런 땡 보직이 있었어? 하는 반응을 보인다고. 내 새끼한테 들었다.
난 목동이다. 현장이 편하다.
목동의 마음으로 혼자 조용히 잘 돌아가고 있는 완전 자동화시스템 반도체장비를 양 떼처럼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닝겐들 다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말도 많고 탈도 많다. 어디가 아픈 녀석은 항상 아프고 무슨 일이 생기는 녀석은 항상 그런 일이 생긴다. 알아보면 거짓은 아니다. 근데 참 신기하다. 도대체 나에게는 일평생동안 단 한번도 발생하지 않는 일이 저 친구에게는 왜 매일 발생하는 것일까? 생각하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그냥 내치자. 예? 안 돼요, 젤로 예뻐하실 때는 언제고 내치신다고 그러세요? 내가? 네. 내가 그 녀석을 젤로 예뻐한다고? 아니세요? 뭔 소리야? 내가 젤 예뻐하는 건 너지. 에이, 전 안중에도 없고 맨날 신경 쓰시면서. 그건 그 짜식이 그 모양이니까. 아무튼 안 돼요. 우린 가족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 알았다. 내 생각이 짧았다.
로봇은 이러쿵저러쿵 말이 없고 일만 잘한다.
매일 하루가 똑같다. 관련 부서 사람들이 메일을 보내오고 구체적인 업무협조 사항을 말한다. 난 예스맨이다.
어느 날, 품질팀에 새로 들어온 신입사원이 인사를 해왔다. 목에 걸린 사원증을 보았다. 이름이 독특하다. 이만 때 신입사원들은 사원증을 한 몸처럼 여긴다. 프라이드다. 난 개목줄이다. 그래서 잘 안 차고 다닌다. 호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업무 관련 메일을 몇 번 주고받았다. 현장에 언제 들어가시냐 저 지금 들어간다. 직접 확인할 게 있다. 네, 저도 들어갑니다.
예쁘고 어린 아가씨다. 알퐁스 도데의 별에 등장하는 아가씨 스테파니라고나 할까. 난 원래 친절한데 더 친절하다. 한 장비를 세우고 테스트하면 스타트부터 원하는 결과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꽤 걸린다. 차트는 변동되니까 모니터링은 계속된다. 각자의 컴터가 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메인장비의 모니터를 향해 머리를 맞대고 함께 확인한다. 그냥 그렇게 된다. 스펙을 벗어난 것들에 대한 수치를 얘기하기 편하기 때문이다.
근데요.
네?
메일 있잖아요.
네.
난 목동이다. 아가씨가 날 빤히 쳐다본다. 뭔 소리를 하려는 거지?
메일 뭐요?
왜케 잘 쓰세요?
네? 메일요?
네.
다들 그렇게 쓰지 않나?
아니요?
뭐가요?
달라요.
에이 뭐가 달라요. 다들 똑같지.
아뇨 달라요. 저 메일보고 부장님 누구신지…
뭐 별거 없는데. 걍 쓰는 건데.
네…
아, 네.
이러다 보니 친해졌다.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다. 말랐다. 밥을 안 먹고 다니나 보다. 아니, 뭘 안 먹고 다니나 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 아가씨가 업무협조요청 메일도 없이 현장에 들어간다고 톡이 왔다. 남들 출근하는 시간이었다. 들어가 옆에 앉았는데 술냄새가 술냄새가… 이 아가씨가 미쳤나.
괴로운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중에 얘기하자고, 저쪽 가서 자라고 재웠다. 업무시간이다.
이건 죄일까? 배려일까.
난 목동의 마음으로 머리가 무척이나 무거운 아가씨가 사장님께 제출해야 할 과제를 다 작성해 주었다.
메일 보고 놀란 마음 더 놀라라고 엄청 신경 썼다. 나 사실 밖에서 글로 돈을 좀 버는 사람이라고 말하려다 참았었다. 그러다 문득 사장님이 내 스타일을 알 것 같아 삭제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에 빠져 들었다.
북극성은 항상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
북극성이 다른 별들과 같이 돌면 곤란하다. 들키면 내가 다 바카라임지기로 하고 저장을 눌렀다. 정신 차리고 일어나 전송과 삭제를 선택하는 건 아가씨의 선택이다.
아가씨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코를 골면 깨울 거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하나도 궁금하지가 않다. 아직 젊어서 그런 거겠지.
난 선을 넘은 걸까? 모르겠다.
아가씨의 진짜 이름은 가을이다.
성은 밝힐 수 없다.
난 그저 일개 목동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