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공포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문제의 시작인 것 같다. 뭐 하나 내세울 게 없으니 대가리에 뭐라도 들어 있는 척하려고 바카라을 읽었던 것 같다. 민음사에서 나온 보르헤스 전집 중 불한당들의 세계사를 옆구리에 끼고 다녔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또 쓰는 척을 했었다. 그때 난 누구에게 그토록 잘난 척을 하고 싶었고, 있어 보이고 싶었던 걸까? 내 글에는 어떤 빈곤이 존재한다. 부자는 가만히 있어도 그냥 부자인데 없어서 있어 보이려고 애를 쓰는 가난한 사람처럼, 내가 쓰는 글에는 그런 빈약함이 존재하고 딱 봐도 없어 보인다. 티가 난다.
위로 누나가 넷이다. 어린 시절 누나들에게 둘러싸여 예쁨을 많이 받고 자랐다. 누나들은 하나 같이 말했다. 경주야, 여자 애들한테는 친절해라. 남자는 정말 친절해야 해. 여자들은 있잖아? 싫은 사람 손이라도 스치면 오물이 묻는 기분이야. 그러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나중에 생기면 먼저 다가가지 마. 그쪽이 좋으면 알아서 너한테 다가와. 배 깔고 엎드려 누나들이 일기장에 쓰는 글을 같이 따라 쓰고 웃고 그랬었다. 서예가였던 아버지는 나에게만큼은 엄격했다. 누나들에게는 친절했다. 글씨를 완성하고 낙관을 찍고 손부채로 말리기 시작하면 나의 고통은 시작되었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뭐가 올바른 건지. 성인의 도가 무엇인지. 공자 왈, 맹자 왈. 끝이 없다. 다시 물어본다. 난 얼어붙어 대답하지 못한다.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또 물어본다. 머리가 하얗다. 쯧쯧쯧, 혀 차는 소리. 내가 느그 엄마만 안 만났어도. 내 팔자야. 내 우월한 유전자가 어쩌다 저런 열등한 종으로 뒤바뀌어 태어나 함께 숨을 쉬고 있는지. 뭔 그런 안타까움이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붉은색 낙관이 어서 마르라며 손부채질을 더 빨리 하셨다. 이미 말랐는데. 누나들이랑은 또 농담도 잘하신다. 나도 여자가 되고 싶었다. 내가 그래서 타인의 지문을 극도로 혐오하고 싫어한다. 라이터라든지, 누가 내 물건을 한번 만지면 돌려받지 않는다. 그냥 줘버린다. 저 붉은색 낙관처럼 상대방의 지문이 내 물건에, 내 기억 속에, 박히는 기분이 너무 싫다.
난 누나들이 나에게 한 말, 여자들에게는 항상 친절하라는 말을 지금도 소중하게 생각한다. 또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 하지만 이해하는 법과 붙잡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하나의 글을 쓰고 아버지처럼 손부채 질을 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