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읽고
지금까지 헤밍웨이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 젊어서 읽었던 『무기여 잘 있거라』『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는 도무지 재미없고 지루하다는 기억만 있다. 왜 명작일까 의아했다. 좋아하는 배우 게리 쿠퍼가 나오건만 영화도 보지 않았다. 『노인과 바다』는 중년 이후 다시 읽으니 어렴풋이 훌륭함이 깨달아졌으나 앞의 장편들을 다시 읽을 마음은 전혀 생기지 않는다.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은 나의 이런 견해를 북돋워 주었다. 주인공이『무기여 잘 있거라』를 형편없는 바카라이라며 까는 대목이 있는데, 십 대 청소년의 철부지 선언이래도 마음이 시원했다.
글쓰기에서 간결함을 지향하면서도, 하드보일드 문체의 대가인 헤밍웨이에게 배울 의향은 없었다. 영어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삶의 모습과 성품 때문에 거리감이 생긴 면도 있다. 엄밀히 말하면 질투 섞인 양가감정이다. 그는 열정이 있으면서도 실행력이 있는 그야말로 동사형 인간인데, 나는 갈망(원함)만 많은 베짱이 형(P형)이다.
파리와 스페인과 아프리카를 넘나들었던(아직 유럽이 관광객의 몸살을 앓기 전에) 그의 행적을 부러워하며, 그리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처량히 여기고, 그를 아니꼽게 여겼던 것 같다.
“표범, 코뿔소, 버펄로 뿐 아니라 아름다운 가젤까지 죽였다니….”
그의 사파리 사냥을 과도하게 비판한 것은 아프리카 야생의 정경(情景)을 보지 못한 나 자신의 한(恨)을 투사한 면이 없지 않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영화와 바카라에 심취한 나의 로망과는 다르게 짝꿍은 전혀 관심이 없다. 나를 가엾이 여긴 절친이 남편이 탄자니아에서 NGO 일을 하게 되자 세렝게티에 초대한 적이 있다. 그때 체력 등 여차 문제로 주옥같은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낚시는 또 어떤가? 중학교 때까지 아버지 따라 저수지에서 붕어를 낚곤 했다. 철쭉이 핀 야트막한 산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언젠가는 좀 더 크고 멋진 호수에 갈 수 있으려니 했다. 웬걸 저수지와 초록 공간에는 속속 아파트가 들어차고, 결혼을 하고 보니 시댁 사람들은 야외 활동을 퍽 낯설어했다.
헤밍웨이 글에서 천혜의 자연 속 계곡과 바다낚시 장면을 읽으면 기분이 묘해지곤 한다. 저자와 나의 삶을 비교할 이유가 없는데 계속 대비하고 있는 것이 참 이상도 하다.
여러 가지가 못마땅하니까 그의 마초 이미지를 더해서 내 마음의 비밀 장부에 매력 없는 작가로 분류해 버렸다. 요즈음 어떤 세상인데 하며.
그런데 9월에 헤밍웨이를 다시 알게 된 계기가 생겼다. 그의 첫 장편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다루는 북 클럽에 우연히 참여하고 서다. 그동안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에 대해 얼마나 선입관을 갖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주관이 뚜렷하다고), 나의 무지함으로 인한 편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