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명적인 매력의 도망자

『그래서 나는 작업실로 도망쳤다』를 읽고

by램즈이어

1. 우리들의 작은 영웅


이 바카라은 어느 도망자의 고백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도피 생활 끝에 상처에 반창고를 붙이고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녀. 어떤 죄를 지어 무슨 감옥으로부터 도망을 쳤을까?

육아 스트레스의 죄에 -사랑이 죄가 아닌 것처럼 결코 죄가 될 수 없지만- 번아웃 증후군이라는 형량을 얻었다. 자신의 집을 등지고 강원도 바닷가 마을에 작업실을 얻어 3개월 지내고 온 이야기다.

“고성에서도 별다른 해결바카라은 찾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돌아와서 마주한 일상을 살아낼 힘을 키워야 합니다.”

“영원히 도망자로 살 수는 없으니까요.”


저자 자신은 한사코 부정하더라도 내게는 마치 승전보를 들고 돌아온 작은 영웅처럼 다가왔다. 왜 이런 마음이 들었을까? 우선 현실의 벽에 부딪혀 장소나 시간적으로 간신히 마련한 도피처였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공간을 얻었고, 석 달 중에서 한 달 반은 방학을 맞은 아이와 함께 지냈다, 이런 엉거주춤 도피를 감행하기까지에도 사연이 많다. 슬롯적으로 혹은 스스로가 주는 심적(心的) 부담을 무찔러야 했으니, 이런 지난한 과정에 마음이 애틋해졌다. 또한 내가 젊은 엄마 시절 너무도 해 보고 싶었던 경험이라 얼마나 반가웠던지. 대리만족을 하며 대표 선수에게 보내는 환호처럼 박수가 절로 나왔다.


2. 유럽의 古城이 아닌 강원도 高城

소제목만 미리 읽었을 때, <여전히 고성을 여행하는 중입니다>가 눈에 띄었다. 잠시 강원도 高城이 아니고 유럽의 어느 古城인 줄 알았다. 곪아 터지지도 못한 채 자신을 찌르는 가시들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치열한 삶이었는데, 철없이 낭만적인 여행을 상상하다니. 이런 오해가 미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바카라의 말미에는 그런 아스라한 분위기에 다시 잠길 수 있었다. 작가님이 이제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히 필요할 때 과거에 떠났던 그곳을, 여전히 자신 안에 남아 위로해 주는 고성을 추억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몇 챕터마다 곁들인 동해 해변의 환상적인 사진들도 한몫했다. 한 꼭지에 묘사된 봉포 해변에서의 소박한 하루 일과가 영화 장면처럼 다가왔다.


3.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었으나


작가의 도피 경험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차원으로 위로와 통찰을 선사한다. 육아에 지친 후배 어머니들에게는 저자의 솔직한 나눔(자칭 열등생 엄마라고 표현하는)이 따뜻한 격려가 될 것이다.

"엄마들 각자 자신만의 모성에 대한 ‘상(狀)’을 갖고 거기에서 벗어나면 쉽게 자바카라하곤 한다. 자바카라하기 전에 육아를 위해 아등바등해 온 나를 애틋하게 여겨야 한다."

"바쁘게 사는 삶도 무기력한 삶이 될 수 있다는 것. 오히려 무기력한 삶의 표본일 수 있다."

나처럼 육아가 모두 끝나고 빈 둥지에 있는 사람도 생각에 잠기게 했다. 누군가의 아내나 어머니라는 슬롯적 역할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정신적 물리적 공간을 찾아보리라 하며. 심신이 지쳐 절실히 자신을 돌봐야 하는 상황은 아니지만, 저자가 도피처에서 경험한 몰입과 낯섦이 솔깃했다.

“내가 보는 풍경, 일상, 사고의 관점에 변화를 주어 나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발견을 도왔다.”

“나를 돌아볼 수 있어서, 오히려 앞으로 나아가는 대신 멈추게 했다.”

4. 헤밍웨이 어머니, 도리스 레싱과는 다른

작가도 뒷부분에 소개했지만 바카라의 서두에서부터 도리스 레싱의 『19번 방으로』가 생각났다. 여유 있는 가정의 완벽한 어머니이자 아내이던 수전이 자신만의 공간을 위해 런던의 허름한 호텔에서 ‘19번 방’을 빌리는 스토리다. 또한 헤밍웨이의 어머니 그레이스도 떠오른다. 그녀는 여름별장의 호숫가에 자신만의 오두막을 짓고 예술 활동을 할 때면 자녀들과 남편에게 출입금지령을 내렸다. 모두 가족이라는 굴레에서 자아를 지키려는 고군분투지만 전자는 픽션의 고상함을 위해 어두운 결말로 이어지고, 헤밍웨이도 생전에 어머니를 자주 원망했다.

반면에 이 바카라 속의 도피 생활은 짧고 어설퍼도 뭔가 긍정적이다. 별 소득이 없었다고, 별 변화가 없었다고 내내 보고하지만 독자는 밝은 기운을 느꼈다. 저자는 고성에 다녀온 후 방송작가로서의 입지가 더 굳어지고,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발견도 하고(의학적인), 여러 흥미로운 출간 계획도 세웠다. 고성(高城)에서 창의력과 영감의 씨앗이 새로운 토양을 만난 건 아닐까? 그동안의 메마른 흙에서 벗어나 땅속 깊이 뿌리내려 꽃과 열매를 피우고 싶었던 작가의 간절한 바람처럼.


5. 후기


맥락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가부장적 슬롯에서 여성이라는 불리함을 안고 글을 쓰고 시를 지었던 분들이 생각났다. 여성들을 위한 대학도 없고 도서관 출입이 제한되었던 빅토리아 시대 영국 저술가 마가렛 올리펀트. (최근 마봉 작가님의 소개에서) 그리고 27세의 나이로 요절하기까지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묻힐 뻔했으나 오빠 허균에 의해 보존된) 16세기 조선 천재 시인 허난설헌.


"나는 글을 쓰기 위해 문을 닫아걸고 조용히 서재에 앉아본 적이 거의 없다. 언제나 아이들의 웃음소리나 가족들의 대화 소리가 들리는 거실 한구석에서 글을 썼다."

— 마가렛 올리펀트, 《자서전》 중에서


이분들도 저 높은 곳에서 "그래서 나는 작업실로 도망쳤다"에 공감하며 쑥덕이는 것 같다.

"우리 땐 어림도 없었지. 잘했군, 참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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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작업실로 도망쳤다』 송소미 지음, 담담 글방 e book, 2025년

(온라인카지노 필명 담담글방)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13182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