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묵한 다정

by운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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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몇 살부터 또렷한 이미지로 자신의 과거를 기억할까?

사진이나 누군가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의 사실로서가 아닌 자신의 뇌리에 각인된 기억의 시작이 궁금하다.

왜 두 세 살 때의 기억은 없는 거지?


내 기억의 시작은 일곱 살 여름이다.

이른 아침을 먹고 방안에서 동생들과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을까? 아님 바카라을 읽고 있었을까? 갑자기 안방 쪽이 분주해지고 동네 어르신인 병춘이 할머니와 큰엄마가 오시고, 우리들은 방 밖으로 내쫒겼다. 뭔가 심각하고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언니는 학교를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우왕좌왕 하다가 학교로 가버렸고, 난 한동안 마루 위에 놓여 있는 많지 않은 우리집 세간들을 지켜보며 흐르는 시간들을 견디고 있었다. 한참 뒤 어른들의 한숨 소리와 함께 드디어 안방 문이 열렸다. 엄마가 울었나? 그건 잘 모르겠다.


우리 막내 동생이 태어난 날이다.

우리집 다섯 번째 따님이시다!!!


그 이후로도 몇몇 장면들은 마치 영화 속 장면처럼. 또는 낡은 앨범 속 사진처럼 기억이 난다.

내가 태어나 자란 1970년대 농촌은 막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고 동네마다 뭔가 들썩거리며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대부분의 집은 안방, 건너방, 사랑방, 길다란 마루, 그리고 마당으로 나가야 갈 수 있는 부엌(우리집 부엌 문에는 하얀 글씨로 부엌이라고 써있었다. 난 그래서 그 어려운 부엌이라는 단어의 받침을 틀리지 않았었다)이 있었다.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어 어린아이 걸음으로는 제법 많이 가야하는 화장실(뒷간) 등이 있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우리 자매들은 쪼로록 함께 화장실을 다녀왔다. 스스로 대소변을 가릴 줄 알게 된 후에는 밤에 오줌이 마려워 잠이 깨서 혼자 그 머나먼 뒷간에 다녀오는 것은 여간 무섭고 귀찮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랑 아버지랑 서른 살 차이가 나니 내가 당시 일곱 살이었으면 우리 부모님은 서른 일곱 살이었다. 엄마랑 아버지는 동갑이다. 아니 엄마가 사실 한 살 더 많다. 그래도 엄마는 늘 동갑이라고 하신다. 그 당시엔 여자가 연상인 것이 훙이었던 것이다.


서른 일곱의 젊은 아버지

와~ 얼마나 젊은 나이인가?

나의 서른 일곱도 까마득한데....

우리 어머니 아버지에게도 그런 나이가 있었다니......

우리 큰아들이랑 네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부모님에게도 그런 나이가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다.


새벽 어스름에 잠이 옅어지며 막 잠에서 깰 때는 소곤소곤 두 분의 대화 소리가 돌리곤 했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의 뒷담화나, 누구네 집에 무슨 일이 있었다느니, 앞으로 다가올 집안 대소사를 조곤조곤 이야기 하곤 하셨다.

때로는 어렴풋 잠이 깨서 둘러보면 엄마랑 아버지가 누워 계시던 자리가 휑하니 비어 있을 때가 있다. 겨울이면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방을 따뜻하게 데우던 시절이었으니, 밤새 차가워진 방바닥을 따뜻하게 데워 새끼들 등을 덥혀 주시러 부엌에 나가서 아궁이에 군불을 때고 있었던 것이다.

겨울에 두 분의 새벽 토크는 아궁이에 장작을 밀어 넣으며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두 분에게 어찌 힘든 일만 있었겠는가?

아들을 하나 밖에 못 낳아 아쉬웠지만

딸만 내리 다섯을 낳았지만

자식들 모두 총명하고 착하게 자라서 키우는 보람도 있으셨으리라.

육남매 키우며 느끼셨을 그 모든 기쁨과 각오를 다지는 전우애를

두 분은 새벽 이부자리에서 또는 새벽 아궁에 앞에서 단합대회 하듯 돈독하게 하셨으리라.


두 분의 가까운 어깨를 보며 우리는 자랐으리라.

그 든든한 등을 보며 우리 육남매는 자랐으리라.

안심해도 되는 공간,

든든한 부모.


그것은 어린 아이에게는 우주다!

온 세상이다!!






채운의 시 <묵묵한 다정>중에서 운촌 쓰다








묵묵한 다정



채운



잠의 틈새 빠져나와 뒷간엘 갈라치면

방안 가득 다섯 남매 얼크러져 있고

아랫묵 귀퉁이 이부자리는 곱게 개켜 있다

해우를 마치고 꺼져가는 새벽별 항해

후후 입김 불며 돌아오는데

부엌문 새로 비어져 나오는 소곤대는 소리

살몃살몃 좇으니

아궁이 앞 다붓이 마주한 두 얼굴

주황빛 꽃물 들어 환하다

좁혀 앉은 자리 더 없이 곰살갑다

짚북데기 같은 일상 속

저리 묵묵한 다정 숨겨두었다니

불 기운 돋우어

간밤 내 식어버린 온돌 데우던

지상에 뿌리내린

별 두 송이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