갚을 수 없는,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

가족의 사랑

by김상욱

1993년 10월 17일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얼마가 되었을까? 아마 한 달도 채 되지 않아서 나는 조부모님이 계신 경상북도 예천으로 가게 되었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셨기에 나를 봐줄 시간이 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물론 조부모님도 농사일 때문에 바쁘시긴 하셨지만.


농사를 지으시면서 딸기, 쌀 등 모든 수확물을 팔아서 아들 둘 딸 하나까지 모두 대학을 보내신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은 그렇게 나를 받으셨다. 아마 여쭤보지는 않았지만 부모님께서 나를 맡긴다고 하셨을 때 절대로 단 한 번도 망설이지 않고 오케이 하셨을 것이다. 그냥 그것이 부모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자식들을 위해 한평생을 뒷바라지하시며 희생하셨지만, 손주를 위해서 또 남은 평생을 희생하는 것. 그것이 부모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무조건적인 사랑은 설명할 방법이 없다.

어쨌거나 나는 너무나도 큰 사랑을 받으며 살았다. 내 기억에 남는 것은 할머니께서 쭈꾸리고 앉으셔서 딸기 수확을 하실 때, 나는 그 순간조차 포대기에 싸인 상태로 새벽부터 할머니의 등에 업혀 있었다. 정말 많이 귀찮게 하면서. 또한 어느 순간 걸어 다닐 수 있을 때가 되었을 때는, 할머니 등에서 나와 비닐하우스 안에서 팔아야 될 딸기를 반입씩만 먹고 버린 기억이 난다.
정말 말썽장이었다. 유승호 배우의 <집으로>라는 영화를 아는가? 그 정도까지의 패륜(?)급 말썽은 아니었지만, 잔병치레가 많이 아팠고, 조부모님의 속도 많이 썩였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갚을 수도 없는 많은 사랑을 받았다.


청년들은 이미 다 떠나버려 할아버지, 할머니밖에 남아있지 않던 시골. 나는 내 스스로 말썽쟁이었다고는 하지만, 어른들 눈에는 재롱둥이였다. 애기가 귀한 시골에서 모든 분들이 감사하게도 마주치면 사랑을 주셨고 너무나도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지금의 모나지 않은 성격이 그때 그 어르신들께서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한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그 시절의 따뜻했던 기억

지금 돌이켜 봐도, 지금의 아이들은 가질 수 없는 내 또래. 아이들은 가질 수 없는 좋은 기억들을 나는 많이 가지고 있다.

우리 집 뒤의 논.
여름 논에 푸른 벼,
가을의 황금나락.
여름철에 도랑에서 어른들이 반두를 대고 있으면. 저 멀리서 달려와서 미꾸라지를 모는 일.
이산 저산을 누비며 친척 형들과 사슴벌레와 장수풍뎅이를 잡는 일.

할아버지께서 커피를 드시고 계실 때, 옆에서 기다리다가 남기신 한모금을 홀짝거리면서 마시던 일.
늦은 밤 배고프다고 어리광 부리면 할아버지께서 한밤중 푹익은 라면을 끓여주시던 일.

가끔씩 먹던 양념치킨의 맛.
집 앞 강가에서 멱을 감고 피라미 낚시를 했던 일.

매일 아침 우리 집 앞 우체통을 열어보면서 편지가 왔나 안 왔나, 부모님께서 보내주신 선물이 있나 없나 살펴본 기억.

그렇게 하루하루 행복했지만 행복했던 걸 몰랐던 어린 시절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왜인지 모를 미소와 함께 그때의 추억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서 3년 후 내 동생이 태어났고 내 동생도 나와 같이 시골에서 자랐다.

동생도 나와 같은 개구쟁이였다.
하지만 사랑의 힘은 정말 위대하다. 나와 똑같은 내 동생을 사랑해 주신 할머니 할아버지의 그 무한한 사랑을 절대로 잊지도, 갚지도 못할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 내가 7살 정도 되었을 때 나는 서울로 오게 되었다. 학교에 가야 되기 때문이었다. 할머니께서는 할아버지를 혼자 두시고 아직 어린 나를 보살펴 주기 위해 나와 같이 서울에 오셨다. 어렸던 나는 부모님과 같이 사는 것은 좋았지만, 마냥 서울생활이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시골에 비해서 너무 좁은 집은 둔촌동의 작은 반지하였다.

경상북도 사투리가 심했던 나는 놀림을 받기 일쑤였고, 할머니 할아버지 밖에 계시지 않던 한적한 시골에서, 사람들로 붐비던 서울로의 상경은 너무 힘들었다. 유치원의 급식도 입맛에 맞지 않았고, 서울의 아이들은 시골과 많이 달랐다. 특히 시골에서는 또래 애들을 많이 보지도 못했는데, 또래 여자애들을 처음 봤던 나는 엄청 부끄러움을 탔던 것 같다. 그 어린 나이에 뭐가 그리 쑥스러워서 눈도 못 마셨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1년쯤 지났을까. 서울 생활이 아주 조금 몸에 익을 무렵, 나는 강동구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활발했던 나는 어렸을 때도 운동하는 것을 좋아했었는데, 집 앞 공터에서 동네 친구들과 함께 모여 공을 차고 놀았던 것이 기억에 난다.
이것 또한 아름다운 추억이다. 모래가 가득했던 그 공터에서 축구를 하고, 비 오면 땅 파서 모래성을 짓고. 우리 집은 게다가 1층이어서 동네 애들이 운동 이후 목마르다고. 우리 집에 찾아와서 물도 많이 마셔서, 아예 대문 밖에 양동이로 아이들이 마실 물을 퍼놓을 정도로 할머니, 부모님의 인심이 좋으셨다.

단편적인 기억이지만, 우리 집에 오기만 하면 누구든지 배부르게 먹고 갔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명암이 존재하듯이, 물론 좋은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월, 화, 수, 목,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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