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계여 영원하라.
바람 부는 날 쫄바지를 입고 홍제천에 갔다.
추석이 지나 절기상으론 진작 가을이지만 길가에 핀 코스모스 사이로 늦여름 기운이 가끔 불어오는 바람에 묻어났다.
한강 방향으로 홍제천을 따라 뛰다가 가끔 버거운 느낌이 들어 걷고 뛰기를 반복하다 안 되겠다 싶어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한가위 명절 고속도로 정체는 엄청났다.
항공기 이코노미 같은 운전석에 반나절 이상 갇혀 있어 온전히 펴지 못한 다리에 무리가 온 것 같다.
운이 좋아 겨우 들어간 휴게소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릴 때 꼼짝없이 장시간 운전만 한 탓인지, 무하마드 알리에게 한 방 얻어맞은 사람인양 자꾸 다리에 힘이 풀려 게처럼 옆으로 걸어댔다.
집으로 돌아올 때, 길가 옆으로 사람 키보다 살짝 높은 관목과 수풀 사이로 인기척이 들려 쳐다봤다.
언뜻 보니 이 근처에 사는 분들인 것 같은데 자전거를 풀숲에 세워놓고 뭔가에 몰두해 있다.
가만히 살펴보니, 네다섯 명이 풀숲 사이에 판을 깔고 화투판을 벌렸다.
이분들 연령대는 월남전 참전용사급으로, 칠십 대 정도로 보이는데.
길가를 지나가는 행인들의 동태를 면밀히 살피면서 화투장이 뚫어져라 그들만의 작전을 펼치고 있다.
여기서 지척인 다리 아래 넓고 확 트인 장소가 있는데, 그곳을 버려두고 굳이 삼엄한 경계 태세 아래 이 구석에 은신처를 마련하여 화투판을 벌린 이유는 무엇일까?
그곳에서 판을 벌릴 경우 지나가는 러너와 사이클 타는 사람들이 신고할 것을 염려했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더 조심해야 하는, 이 워게임에 참전 중인 한 사람은 버젓이 연초를 물고 공기 중으로 담배 연기를 긴 꼬리 달린 연처럼 날리고 있다.
이분들을 어찌할꼬, 오락 장소가 마땅치 않은 것은 이해되나, 운동하는 곳에서 담배까지 태우다니.
이쯤에서 나는 또 엉뚱한 상상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담배를 입에 문 그분의 모습은 흡사 꽁초의 제왕인양,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사우론을 연상케 하는데.
그는 기초 질서와 공중도덕을 대놓고 무시함으로써 이곳 중간계의 질서를 뿌리째 흔들어대고 있는 것이다.
그의 꽁초는 절대 반지에 버금가는 것이어서 입에 문 담배를 풀숲 어딘가에 던져버리기라도 한다면 이곳은 영원히 무질서의 늪에 빠지게 될 것이었다.
누가 프로도가 되어 저 꽁초의 제왕을 저지할 수 있을까?
홍제천을 달리다 가끔 집게를 들고 환경 정화하러 나온 봉사자들을 만나는데 혹시 그분들이?
그렇다. 이들은 사우론과 프로도에 빙의되어 꽁초의 제왕과 봉사자의 모습으로 스크린 밖에서 또 다른 대결을 펼치고 있는 건 아닌 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가 저려와 어기적 거리다 든 이런 생각 끝에 또 피식 웃고 말았다.
프로도가 이겨야지 암, 중간계여 영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