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자라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오랜 격언이 있다. 한 생명이 온전한 슬롯 구성원으로 뿌리내리기까지 공동체의 촘촘한 돌봄이 필수적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미 다 자란 어른이 무너져 내릴 때는 어찌해야 할까.
각자도생과 효율성이 지배하는 현대 슬롯에서 다 자란 이들의 실패는 대개 개인의 무능이나 나약함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그러나 스스로를 지켜낼 힘을 잃고 벼랑 끝에 선 청년들에게, 과연 우리 슬롯는 어떤 손을 내밀고 있는가.
제12회 온라인카지노북 출판 프로젝트 대상 수상작인 김슬기 작가의 장편소설 <강하고 아름다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는 냉혹한 현실에 내몰린 서른세 살 어른, 강하고의 이야기다.
이름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게 고단한 삶을 버텨내던 배달 기사 강하고. 지독한 가난과 고립 속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던 순간, 기묘한 구원자들이 찾아온다. 범상치 않은 활력과 불끈불끈한 육체를 지닌 바다 마을 구절초리의 할머니 3인방이다. 이들은 마치 히어로처럼 하고를 납치해 자신들의 품으로 데려간다.
이 소설이 지닌 가장 눈부신 미덕은 환대의 방식에 있다. 할머니들은 패배감에 젖은 청년에게 거창한 훈수를 두거나, 눈물겨운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그저 "헛소리 말고 퍼뜩 일어나 밥이나 먹자"며 따뜻한 오징어물회와 배추전을 푹푹 찢어 밀어 넣을 뿐이다.
얼어붙은 몸을 녹일 목욕물을 데우고, 함께 땀 흘려 몸을 움직일 일거리를 준다. 혹시 굶을까 봐 냉장고 가득 채워놓고, 어디 가는지 궁금해 하루 종일 쳐다본다. 마음의 상처가 하루하루 어떻게 아물어가는지 매일 관찰하며 하고를 살핀다.
어느 날, 할머니들은 하고에게 친모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얼굴도 모르고 살았던 엄마가 구절초리에서 오래 다방을 운영하다 몇 달 전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소식에 하고는 마음이 심란하다. 마을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김명희는 참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었지만, 하고에게는 자신을 홀로 버려두고 떠난 야속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설은 억지스러운 화해를 주입하지 않는다. 할머니들은 하고에게 "명희가 이 마을에서 좋은 인생을 살다 간 것은 맞지만, 너에게 좋은 엄마가 아니었던 것 역시 맞다"며 하고가 가진 오랜 원망과 슬픔의 감정을 그대로 인정해 준다.
하고는 엄마가 남긴 유일한 공간인 만나다방을 다시 열기로 한다. 메뉴를 다듬고 다방 안 묵은 먼지를 치우는 과정은 하고가 세상 밖으로 다시 걸어 나올 준비를 하는 과정과 닮아 보인다. 엄마의 손때가 묻어있는 공간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버려졌다는 상처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치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방이 다시 문을 열자, 이내 마을 할머니들의 시끌벅적한 사랑방으로 바뀐다. 늘 고립된 채 배달 오토바이를 몰던 하고의 공간에 찾아와 안부를 물어주는 이웃이 생긴 셈이다.
소설 속 구절초리의 노인들은 우리가 흔히 미디어를 통해 소비하던 연약하거나 시혜적인 노인의 상을 기분 좋게 배반한다. 복싱과 축구를 즐기며 몸과 마음을 단단한 근육으로 꽉 채운 이들은 주체적이고 위풍당당하다. 강하게 묘사된 노년의 모습을 보면서 나 역시 '어떻게 나이 들 것인가'라는 실존적 질문을 하게 된다.
동시에 혈연과 세대를 뛰어넘는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수십 년의 세월이 가로막고 있어도 함께 먹고, 일하고, 노는 행위를 통해 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든든한 공동체가 된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궤도에서 분투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아무리 단단한 인간이라도 혼자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이 무너지는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때 필요한 것은 날카로운 채찍질이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안전한 울타리와 온기 있는 밥 한 끼다.
김슬기 작가는 다 자란 어른이 다시 회복하는 데도 결국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우리 안에는 여전히 타인을 구원할 다정한 힘이 남아있음을 나지막이 증명해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