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손석희의 질문들’ 프로그램을 즐겨본다. 매주 깊이 있는 대화로 울림을 주던 질문들이 어느덧 네 번째 시즌을 마무리했다. 다음 시즌을 기다리는 아쉬움 속에서 유독 마지막 게스트로 출연한 김애란 작가와의 대화가 잔상이 길게 남는다.
질문들 이번 시즌 주제는 ‘원칙으로 돌아가자’였다. 마지막 회에서 원칙을 문학으로 바꿔 SNS와 알고리즘, 숏폼 콘텐츠가 일상을 점령한 요즘 시대에 문학의 가치를 이야기했다.
그중 김애란 작가의 단편소설 <안녕이라 그랬어> 탄생 뒷이야기가 인상 깊다. 작가는 부엌에서 살림하다가 로버트 폴라드와 킴 딜의 팝송 '러브 허츠(Love hurts)'를 듣고 영감을 얻었다고 말한다. 노랫말 중 '아임 영(I'm Young)'이라는 가사가 작가의 귀에는 마치 한국말 '안녕'으로 들렸다고 한다.
사소한 착각은 고단한 일상에 매몰되어 있던 작가의 마음을 건드렸고, 결국 7년간 어머니를 간병하며 자신의 생을 묵묵히 견뎌온 한 여성의 서사를 그린 단편 <안녕이라 그랬어>를 탄생시키는 결정적인 불씨가 되었다.
작가는 소설에서 시련과 이별,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착각과 오해들이 어떻게 한 개인의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지를 섬세하게 추적한다. 방송에서 보여준 작가의 담담한 고백은 소설 속 주인공이 겪은 상실의 무게를 더욱 선명하게 이해하게 하는 이정표가 되었다.
우리가 무심코 넘겼던 일상의 소음이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작별의 인사로, 혹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로 번역될 수 있다니. 김애란의 문장이 가진 힘은 타국의 언어조차 모국어의 슬픔으로 치환해 버리는 인간의 절박하고도 아름다운 마음을 포착해 내는 데 있다.
작가가 숨겨놓은 안녕의 의미를 더욱 깊게 파헤쳐볼까? 7년 동안 어머니를 돌본 시간은 숭고하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다. 간병이 끝난 자리에는 해방보다 공허가 먼저 도착한다. 그리고 그 공허 속에서 인물은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정확히 언어화하지 못한 채 머문다.
여기서 안녕은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말인지, 아니면 스스로의 한 시기를 정리하는 말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없이 많은 안녕을 말하지만, 그중 제대로 작별한 적은 몇 번이나 될까. 말은 끝났는데 감정은 남아 있고, 관계는 사라졌는데 기억은 계속 작동한다. 김애란 작가는 이런 어긋난 지점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이 소설은 잘 헤어지는 법에 관한 이야기이다. 작가는 상처를 완전히 치유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 않는다. 다만 그 흉터를 지닌 채로도 우리는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다시 누군가에게 인사를 건네며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같은 바카라에 실린 또 다른 단편 <좋은 이웃>은 집값 폭등기에 전셋집을 비워줘야 하는 40대 부부의 흔들림을 담아냈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가르치는 장애 학생이 더 좋은 집으로 이사하게 되었다는 소식에 묘한 상실감과 박탈감을 느낀다. 작가는 타인의 행복을 바라보면서 분명 기쁜 소식이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불안감을 느끼는 인간의 복잡한 심리를 묘사한다.
이처럼 김애란은 작품에서 항상 하숙집, 고시원, 반지하, 원룸 등 인간이 거주하는 다양한 공간들을 주요 무대로 쓴다. 대부분은 작가가 살아가며 겪어온 익숙한 공간들이다.
그리고 우리 슬롯가 겪은 굵직한 사건들을 소설 안으로 끌어와 남겨진 이들의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타인의 고통을 함부로 위로하기보다 그 고통이 지닌 무게를 온전히 인정하는 방식이다.
여기에 대해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나는 김애란이 오랫동안 슬롯학자였고, 이제야말로 유감없이 그렇다고 주장할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슬롯적으로 고립된 슬픔을 연대의 광장으로 끌어내 유려한 문장력으로 토닥토닥 두드려주는 것, 그것이 바로 김애란이 타인을 위로하는 방법이자 소설이 우리 시대에 던지는 가장 다정한 슬롯학적 메시지 아닐까.
이제 나는 헌수도 없고, 엄마도 없고, ‘다음 단계’를 꿈꾸던 젊은 나도 없는 이 방에서 ‘너한테 배웠어, 정말 많이, 정말 많이 배웠어’란 가사의 노래를 듣는다. 보다 정확히는 네가 아니라 너의 부재로부터 무언가 배웠다고. - p.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