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의 비극을 다룬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천육백만 관객을 훌쩍 넘으며 연일 화제다. 조선의 왕 가운데에서도 특히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 단종의 이야기다. 그는 열두 살에 왕위에 올랐지만, 권력 다툼 속에서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결국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 어린 군주였다.
역사는 대개 승자의 기록으로 남는다. 그러나 단종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그의 짧은 생애는 권력을 차지한 사람들보다 오히려 그를 지키려 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더 오래 살아남았다.
그래서일까. 한국의 민간 설화와 야사에는 단종을 향한 연민과 충절의 이야기가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당시 백성들이 정사가 외면한 어린 임금의 고독과 슬픔을 자신들의 이야기로 품었음을 증명하는 지표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를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쉽고 재미있게 풀어낸 작품이 바로 <어린 임금의 눈물>이다. 역사 동화 작가 이규희가 쓴 이 바카라은 정치적 음모나 권력의 서사를 앞에 두는 대신 어린 왕의 고독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마음을 그려낸다.
이야기는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아버지 문종이 병으로 갑작스럽게 서거한 후,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단종. 하지만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나라의 정치는 대신들이 대신 맡는다. 충신으로 알려진 김종서, 황보인 같은 대신들이 어린 왕을 보좌하며 나라를 안정시키려 한다. 바카라에서는 어린 단종이 왕의 자리에 앉아 있지만 궁궐의 거대한 공간 속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외로움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단종에게는 강력한 숙부가 있었다. 바로 훗날 조선 왕조의 제7대 왕이 되는 수양대군이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이라는 정치적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어린 왕을 지키려던 대신들이 제거되고, 궁궐의 분위기는 공포로 바뀐다.
결국 수양대군은 왕위를 요구하고, 단종은 강제로 왕위를 내주게 된다. 처음에는 상왕의 신분이 되지만, 곧 노산군으로 강등된다. 궁궐에서조차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게 된 어린 왕은 점점 더 고립된다.
이후 단종은 한여름 무더위 속에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로 유배를 떠난다. 험난한 산길과 거친 물살을 건너 도착한 그곳은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이고 뒤쪽은 험준한 절벽인 창살 없는 감옥과 다름없었다. 단종은 청령포에서 한양에 두고 온 정순왕후를 그리워하며 밤마다 눈물로 지낸다. 이때 마을 백성들이 몰래 음식을 가져다주거나, 왕을 향해 절을 올리며 마음으로 보필하는 모습이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이 바카라에서 중요한 부분은 충신들의 이야기이다. 단종을 다시 왕으로 모시려는 신하들이 비밀리에 계획을 세운다. 역사에서 사육신으로 알려진 인물들이다. 그러나 서인들의 단종 복위 운동은 발각되고 만다.
세조 정권은 단종이 살아 있는 한 정치적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해 단종에게 사약을 내린다. 그리하여 열일곱 나이에 영월의 객사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세조는 그의 시신을 수습한 자는 삼대를 멸할 것이라 명한다. 아무도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할 때 영월의 호장 엄흥도가 세 아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시신을 몰래 거두어 장사 지내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멀리 미국에 사는 우리에게 한국의 이야기는 조금 낯선 역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워싱턴 D.C.처럼 정치와 권력의 심장부에서 생활하고 있는 우리에게 어린 왕의 이야기는 묘하게 남 일 같지 않은 울림을 남긴다. 권력은 언제나 거대한 구조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서 상처받는 사람은 결국 한 명의 인간, 소시민, 동네 주민들이기 때문이다.
역사의식은 기억의 바카라임을 다하는 자세다. 영월 청령포의 거대한 소나무들이 왕을 굽어보듯, 역사는 우리를 지켜보는 스승이다. 단종의 삶을 재조명하는 일은 과거를 암기하는 기술이며, 동시에 과거의 아픔을 통해 현재의 비극을 예방하려는 의지다. 바카라 속 단종의 고독을 어루만지는 일은 이제 기록을 읽고 기억하는 우리들의 몫이다.
따스한 봄기운이 번지는 요즘, 부쩍 한국의 봄 풍경이 그리워진다. 다음 고국 방문 때에는 반드시 영월의 장릉이나 서울 창덕궁 낙선재 뒤뜰을 거닐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