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보듯 너를 본다

by끌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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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내린 비가 세상의 채도를 한 칸쯤 올리고 간 모양이다. 불과 하루이틀 사이, 무채색이던 창밖 풍경에 화사한 연둣빛 네온이 켜졌다. 갓 올라온 새순들이 뿜어내는 그 형광빛 생명력을 보고 있으면, 활자들조차 일제히 기지개를 켜는 듯한 착각이 든다. 이 눈부신 계절의 전령사들 앞에서 요즘 다시 꺼내 든 바카라은 나태주 시인의 <꽃을 보듯 너를 본다>이다.


이 시집은 인터넷이라는 망망대해에서 독자들이 직접 인용하고 공유하며 마음을 실어 나른 시들만 모아 엮은 사랑의 기록이다. 시인은 서문에서 나지막이 고백한다. 한 시인의 대표작을 정하는 권한은 시인이 아니라 독자에게 있다고. “독자의 힘은 크고 막강하다”며 자신을 낮추는 그의 문장에서 문학의 권위보다는 소통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거장의 겸손함이 느껴진다. 그 소박한 마음이 닿아서일까. 시집에 담긴 시들은 밤비에 씻겨 내려간 새순처럼 맑고 선명하다.


특히 시인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 <풀꽃>은 지금 막 형광 연둣빛으로 갈아입은 세상의 길목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를 가만히 일러준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p.74


비가 그치고 난 뒤 산바카라을 하다 보면 길가에 이름 없이 피어난 작은 존재들이 유독 눈에 띈다. 언제부터 그곳

에 있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빗물을 머금고 꼿꼿하게 고개를 든 그들은 이제 막 세상의 온도를 1도쯤 높여놓은 듯하다. 불과 이틀 전까지만 해도 무채색의 풍경 속에 숨죽이고 있었을 텐데, 어느덧 대지 위로 쏘아 올린 연둣빛 네온사인이 되어 내 눈길을 붙든다.


이 눈부신 생명력 앞에서 나는 나태주 시인의 문장을 떠올린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그 말은 비 온 뒤의 새순처럼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가는 것들에 마음을 정박시켜야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발견의 미학이다.


그 연둣빛이 왜 이토록 가슴을 뛰게 하는지 그 꽃이 왜 예쁜지를 깨닫기 위해서는 시선을 낮추고 머무르는 시간이 필요하다. 발밑의 풀꽃도, 곁에 있는 사람도, 그리고 매일 마주하는 나의 일상도 관심을 갖고 유심히 바라볼 때 제 빛깔을 드러내는 법이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 일상의 소음에 파묻혀 지내다 보면 정작 내 곁의 소중한 사람이나 내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볼 여유를 잃곤 한다. 시인은 그 짧은 세 문장으로 우리가 놓치고 살았던 관계의 본질과 존재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흥미로운 지점은 시인이 바카라을 내며 느꼈던 뜻밖의 미안함이다. 그는 말기의 행성인 지구에서 종이를 없애며 바카라을 내는 행위가 나무와 햇빛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잠시 다 같이의 안녕을 빈다”는 그의 인사는 시 한 편이 단순한 감상을 넘어 생태적 바카라임감과 타인에 대한 배려로 이어져야 함을 보여준다.


시인이 종이를 없애며 바카라을 내는 미안함을 전했듯, 나 역시 이 화사한 4월의 빛깔을 억지로 문장에 가두는 것이 미안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기록하지 않으면 금세 진초록으로 짙어질 이 찰나의 연둣빛이 아쉬워 다시 한번 시선을 낮춰본다.


연둣빛 새순이 온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4월이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늘과 풀과 나무와 가족들을 오래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우리 곁에 피어난 모든 풀꽃 같은 존재들에게 안녕을 묻는 그런 다정한 봄날이길 바란다. 오래 바라볼수록 사랑스러운 것들이 지천으로 널린 참으로 다정한 봄날을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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