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가정에 대한 고전적인 환상은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비슷하다. 사랑하는 부부, 밝고 건강한 아이들, 포근한 집, 그리고 예측 가능한 미래.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는 탄탄하고 안정된 가정의 균열을 그리고 있다.
60년대 히피 문화가 독버섯처럼 번지던 시기, 해리엇과 데이비드 부부는 시대에 역행하는 행복의 요새를 꿈꿨다. 완벽해 보이는 가정에 다섯 번째 아이 벤이 등장하며 가정은 참혹하게 붕괴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이상적인 가치와 휴머니즘의 민낯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벤은 뱃속에서부터 태동이 유별났다. 수시로 고통을 느끼다 못해 갈고리 같은 발톱이 그녀의 연약한 내장을 자르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이따금 고통을 잊기 위해 시골길을 활보하거나 질주하고 커다란 부엌칼로 자기 배를 갈라서 아이를 꺼내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진정제를 먹어야만 잠잠해졌다. 임신 기간 내내 해리엇은 고통과 인내, 환영과 망상들로 보냈다.
태어난 후에는 인간의 아이라기보다는 트롤이나 고대 유인원에 가까운 이질적인 외모와 폭력성을 보였다. 형제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애완동물을 죽이며 가문의 성역을 파괴한다.
형제들은 그를 피하고, 부모는 점점 그를 문제아로 인식한다. 결국 벤은 치료 시설로 보내진다. 이 선택은 비극적인 동시에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우리는 흔히 내 상식과 어긋나는 대상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내는 방식을 택하기 때문이다.
엄마로서 아이를 차마 버릴 수 없었던 해리엇이 벤을 다시 집으로 데려오며 가정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해리엇은 벤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식을 버린 비정한 엄마가 될 수는 없다는 자기 강박 때문에 아이를 데려왔다. 무조건적 희생으로 포장된 모성애가 사실 얼마나 취약한 개인의 도덕적 강박인지를 보여준다.
벤은 교육이나 사랑으로 교화되지 않는 존재다. 흡사 늑대소년과 비슷한 야생성을 지녔다. 문명이라는 얇은 막 아래 잠재된 날것의 야만을 상징한다. 여기서 도리스 레싱은 우리가 이질적 타자를 어떻게 대우하는지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오늘날 우리 역시 주변에서 수많은 벤을 마주하고 있다. 그것은 장애인일 수도, 난민일 수도, 혹은 공동체의 규범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적응자일 수도 있다. 소설 속에서 가족들이 벤을 외면하고 각자 흩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현대인이 자신들의 안락한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 타자를 얼마나 손쉽게 배제하고 고립시키는지 돌아보게 된다.
도리스 레싱은 벤을 괴물로 정의하기보다, 그를 괴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정상 가족의 위선과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낯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리고 그 낯섦이 우리 삶의 질서를 위협할 때, 과연 끝까지 함께할 수 있는가.
소설의 결말은 꽤 파격적이다. 벤은 자신과 닮은 무리 속으로 사라지고 해리엇은 텅 빈 저택에 홀로 남는다. 우리가 구축한 행복의 요새가 오직 평범함이라는 전제하에서만 유효하다면, 그 행복은 얼마나 모래성 같은 것인가.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벤은 끝까지 설명되지 않는다. 정말로 괴물인지, 병든 아이인지, 다른 종인지. 세상에는 끝내 이해되지 않는 존재가 있는 법이다. 어떤 모습을 상상하는지는 철저히 독자의 몫이다.
<다섯째 아이>는 묻는다. 당신의 안온한 거실에 불청객이 들이닥쳤을 때, 당신의 인류애는 과연 안녕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전 제 자신을 비난하지 않아요” 해리엇이 말했다. “당신이 그 말을 믿기를 기대하지 않지만요. 하지만 이건 정말 불쾌한 농담이에요. 난 벤이 태어난 이후 줄곧 벤 때문에 비난을 받아온 것 같아요. 난 죄인처럼 느껴요. 사람들이 내가 죄인처럼 느끼도록 만들어. 하지만 벤에 대해서는, 전 그저 죄인이죠!” - p. 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