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폴란드의 작은 마을에
주샤라는 랍비가 살았다.
죽음을 앞둔 그가 제자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자 제자들이 물었다.
"스승님은 모세처럼 지혜로우셨는데
무엇이 두려우십니까?"
주샤는 고개를 저었다.
"저세상에서 나에게 묻지 않을 걸세.
'너는 왜 모세가 되지 못했느냐'라고.
'너는 왜 주샤가 되지 못했느냐'라고 물으실 걸세."
이백 년 뒤 시카고의 상담실에서는
칼 로저스가 같은 마음을 오래 듣고 있었다.
그는 수천 명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 가지를 알아챘다.
사람은 사랑받기 위해
자기 안의 어떤 부분을 조용히 접어둔다.
"공부를 잘할 때만 사랑받았어요."
"씩씩하게 굴 때만 칭찬받았어요."
그는 이것을 조건부 가치라 불렀다.
조건에 맞는 모습은 남겨 두고
맞지 않는 모습은 서랍 깊숙이 넣어버리는 일
그렇게 자란 마음에는 두 개의 얼굴이 생긴다.
남들이 좋아해 주길 바라며 쓴 얼굴과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남아 있는 얼굴.
로저스는 둘 사이의 거리가 멀수록
사람이 더 불안하고 더 공허해진다고 보았다.
그의 바카라에 이런 문장이 있다.
"신기한 역설이 있다.
내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나는 변할 수 있다."
우리는 나답게 살자는 말을
무언가 특별해지라는 말로 오해한다.
남다른 취향을 찾고,
눈에 띄는 일을 벌이고,
다른 사람과 달라 보이려 애쓴다.
그러나 나다움은 새로 지어내는 옷이 아니라
이미 입고 있던 살결에 가깝다.
처음엔 살결이 낯설다.
오래 접어둔 감정은 구겨져 있고
오래 눌러둔 바람은 목소리가 쉬어 있다.
"나는 정말 뭘 좋아하지?"
그 질문 앞에서 한참 말문이 막힌다면
이상한 것이 아니다.
너무 오래 남의 박수 쪽으로 귀를 기울여 왔을 뿐이다.
그러니 나답게 사는 일은
거창한 결심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점심 메뉴 앞에서
"아무거나"를 삼키고
"사실 나는 국물이 먹고 싶어"라고
작게 말해보는 일에서 시작된다.
웃음이 나오지 않는 농담 앞에서
억지로 웃는 입꼬리를
한 번쯤 내려놓아 보는 일에서 시작된다.
때로는 누군가 실망할 것이다.
접어둔 모습이 펼쳐질 때
주변이 조금 술렁이기도 한다.
그래도 로저스가 오래 지켜본 사람들은
술렁임을 지나고 나서
오히려 더 조용해졌다.
애쓰지 않아도 되는 자리를 찾았기 때문
오늘 밤에는 이렇게 물어보면 좋겠다.
오늘 나는 몇 번이나
내 표정을 남의 얼굴에 맞췄을까.
그중 단 하나만
내일은 내 쪽으로 돌려놓아 보자.
모세가 되지 못해도 괜찮다.
누구도 나를 대신 살아줄 수 없고
누구도 내 몫의 이름을 대신 불러줄 수 없다.
주샤는 주샤로 끝까지 걸어가면 된다.
나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특별한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니라
나로서 충분하다는 사실을
하루에 한 번씩 다시 믿어보는 일이다.
은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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