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配慮)
마음을 나누어
상대를 헤아린다는 뜻
그런데 이 말에는
한 가지가 빠져 있다.
나눈다는 것은
내게도 몫이 남는다는 뜻인데
어느 날부터
내 몫까지 모두 건네고 있었다.
1983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
슬롯학자 앨리 러셀 혹실드는
'관리되는 마음'이라는 바카라을 펴냈다.
그녀가 오래 지켜본 곳은
비행기 객실이었다.
승무원들은 승객이 오를 때마다
환하게 웃었다.
피곤한 얼굴에도, 거친 말투 앞에서도
미소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혹실드는 웃음 뒤를 들여다보았다.
그들은 표정만 짓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음 안에서 표정에 맞는 감정을
일부러 길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감정노동이라 불렀다.
감정도 노동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노동에는 값이 따른다는 것
값은 월급 명세서에 적히지 않았다.
오래 웃은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어느 것이 진짜 내 감정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마음을 쓰는 일은
쓰고 나면 줄어드는 일이었다.
회의가 끝난 뒤
말없이 앉아 있던 동료가 신경 쓰여
커피를 건네고 안부를 물었고
점심에는 상대의 표정을 살피며
먼저 대화의 문을 열었다.
누가 불편해할까 봐
말을 고르고 또 골랐고
분위기가 가라앉을 것 같으면
먼저 웃음을 얹었다.
사람들은 나를 편한 사람이라 불렀다.
그 말이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집 현관을 열면
신발을 벗기도 전에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다.
몸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마음이 하루 종일
달려온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가만히 헤아려보니
나는 모두의 마음을
미리 읽고 있었다.
아직 말하지 않은 불편까지
아직 부탁하지 않은 도움까지
먼저 알아채고 먼저 건넸다.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
경계근무에 가까웠다.
배려는 원래
상대의 마음에 한 걸음 다가가는 일
그런데 과한 배려는
내 마음을 한 걸음 비워두고
상대의 마음 앞에 서 있는 일이었다.
촛불은 자기를 태워
방을 밝힌다.
그러나 심지가 다 타고나면
방은 다시 어두워진다.
어둠 속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촛불 자신
그래서
배려의 모양을 조금 바꿔보기로 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혼자 짊어지지 않기
말하지 않은 불편은
말해질 때까지 기다리기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람에게
내가 줄 수 있는 만큼만 건네기
그리고 하루의 끝에
한 가지를 물어보기
오늘, 나는 나에게
얼마를 남겨두었는가
처음에는 이 모든 것이
무심해지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내 몫을 지킨 날에는
건네는 마음이 더 따뜻했다.
넘치지 않는 잔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오히려 오래 맑았다.
배려는 나를 비워서 하는 일이 아니라
나를 채운 자리에서
조금 나누는 일이다.
현관 앞에서 잠시 서본다.
하루 동안 쓴 마음을
조용히 내려놓고
숨을 한 번 깊이 쉰다.
그리고 나에게 말한다.
수고했어.
오늘은 네 몫의 마음도
잘 지켜냈어.
은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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