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49년경, 로마.
철학자 세네카는
친구 파울리누스에게 긴 편지를 썼다.
파울리누스는 로마의 곡물 공급을 맡은 사람이었다.
아침마다 문 앞에는 청탁하는 이들이 줄을 섰고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자기 이름을 되찾았다.
세네카는 이렇게 적어 내려갔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짧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시간을 너무 많이 흘려보내는 것
사람들은 땅 한 뙈기를 두고도
경계를 따지고 문서를 확인한다.
누군가 담을 넘으면 곧장 화를 낸다.
그러나 시간 앞에서는
누구든 들어와도 막지 않는다.
한 시간을 달라는 말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고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을 지켜본다.
잃어버린 돈은 장부에 남는데
잃어버린 시간은 어디에도 적히지 않았다.
그래서 세네카는 편지의 끝에서
벗에게 이렇게 권했다.
이제는 남을 위한 일에서 물러나
자기 몫의 날들을 돌려받으라.
시간은 쌓아두는 재산이 아니었다.
하루에 하나씩
조용히 빠져나가는 재산이었다.
부탁을 받으면 먼저 웃었고
거절하는 말은 끝내 목에서 삼켰다.
일정표는 남의 이름으로 빽빽하게 채워졌다.
저녁이 되면 하루를 되짚었지만
그 안에 나를 위해 쓴 시간은
손바닥 안의 물처럼 남아 있지 않았다.
피곤은 몸이 아니라
내가 없는 하루에서 왔다.
그러다 어느 날
작은 수첩 한 귀퉁이에
조그맣게 빈칸 하나를 만들어두었다.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는
내 이름만 적힌 한 시간
처음에는 낯설었다.
미안함이 먼저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른 사람의 시간도
더 부드럽게 건넬 수 있었다.
시간을 함부로 내어주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에 문을 닫는 일이 아니다.
문 앞에 서서
들어올 것과 머물 것을
조용히 가려내는 일이다.
수문을 열고 닫는 사람이 있어
강은 논을 적시고
넘치지 않은 채 흘러간다.
내가 내어주는 한 시간,
내가 지켜내는 한 시간,
그 둘이 모여
한 사람의 삶이 된다.
수첩 속 빈칸 앞에 앉아
창가의 빛이 천천히 기우는 것을 바라본다.
내 시간이
내 곁에서 한 걸음씩 걸어가는 소리를
오래도록 듣는다.
은파랑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