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 사이에 놓인 한 뼘

by은파랑

1851년 겨울,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짧은 우화 하나를 적어 내려갔다.

혹독하게 추운 날
고슴도치들은 서로의 체온에 기대려고
한 곳으로 몸을 모았다.

가까워지자 따뜻함이 번졌고
곧이어 가시가 서로의 살을 찔렀다.

놀란 고슴도치들은 흩어졌다.
그러자 다시 찬바람이 파고들었다.

그들은 다시 모였고
다시 찔렸고
다시 멀어졌다.

그렇게 오랜 밤을 오가고서야
알게 되었다.

서로를 아프게 하지 않으면서
서로의 온기가 닿는 자리가
어딘가에 있다.

그 자리는 한 뼘쯤 되는 거리였다.
붙지도 떠나지도 않은 채
숨소리가 들리는 만큼의 간격

쇼펜하우어는 그것을
예의와 좋은 매너라 불렀다.

거리는 차가움이 아니었다.
가시를 가진 존재들이
서로를 지키며 사랑하는 방식

나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안부를 묻고
모든 시간을 함께 쓰려했던 사람

가까울수록 따뜻할 것이라 믿었는데
가까울수록 내 가시는 그의 말끝에 걸렸고
그의 가시는 내 마음 어딘가를 긁었다.

그래서 나는 한 걸음 물러섰다.
미워서가 아니었다.
온기를 오래 지키고 싶어서였다.

물러선 자리에서야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가까이에서는 보이지 않던
웃을 때 먼저 올라가는 눈꼬리와
말을 고르는 짧은 침묵이

멀어진 만큼 선명하게 다가왔다.

달과 지구도 그렇다.
너무 가까우면 바다가 무너지고
너무 멀면 밤이 어두워진다.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를 당기는 힘이
물결을 만들고 계절을 만든다.

거리를 둔다는 것은
마음을 거두는 일이 아니라
마음이 오래 머물 자리를 마련하는 일

한 뼘 간격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고
바람 속에서도
서로의 체온은 꺼지지 않는다.

멀어 보이는 두 사람 사이에
가장 오래 닿아 있는 마음이 있다.

은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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