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고타마
기원전 5세기 무렵, 고대 인도의 어느 숲. 새벽빛이 나무 사이로 희미하게 들어왔다.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몸은 뼈가 드러날 만큼 야위어 있었다. 배는 등에 붙은 듯했고 손가락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가늘었다.
앞에는 그릇 하나가 놓여 있었다. 비어 있었다. 오랫동안 먹지 않았다. 욕망을 버리려 했다. 몸의 요구를 이겨내려 했다. 고통을 견디면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었다.
하루. 또 하루.
몸은 가벼워진 것이 아니라 무너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토록 버텼는데도 찾고 있던 답은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빈 그릇을 바라보았다. 싯다르타 고타마. 훗날 사람들이 ‘부처’, 깨달은 사람이라고 부르게 될 수행자였다.
그날 그가 마주한 것은 깨달음보다 먼저 하나의 실패였을지도 모른다. 오래 걸었다는 사실이 그 길이 옳다는 증거는 아니었다.
싯다르타의 정확한 생몰연대에는 학계의 견해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기원전 5세기 전후 북인도에서 활동한 역사적 인물로 본다.
그는 샤카족 공동체의 유력한 가문에서 태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후대의 불교 전승은 그의 어린 시절을 더 극적으로 전한다.
왕자처럼 보호받으며 자랐던 싯다르타가 궁 밖에서 늙은 사람, 병든 사람, 죽은 사람, 수행자를 차례로 보고 삶의 고통을 깨달았다는 이른바 ‘사문유관’의 이야기다.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세부를 그대로 역사적 사실이라고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야기 안에 담긴 질문은 분명하다.
사람은 늙는다. 병든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다. 결국 죽는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행복한 순간조차 사라진다면 무엇을 붙잡고 살아야 하는가. 싯다르타가 붙잡은 것은 답이 아니라 이 질문이었다.
불교 전승에 따르면 그는 스물아홉 살 무렵 가족과 익숙한 생활을 떠났다. 밤이었다고 전해진다. 궁전을 나섰다. 익숙한 세계에서 멀어졌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재산이 아니었다.
왜 인간이 고통받는지 알고 싶었다. 당대의 수행자들을 찾아갔다. 명상을 배웠다. 스승들에게서 높은 수준의 수행법을 익혔다. 하지만 만족하지 못했다.
다시 떠났다. 더 극단적인 길로 들어갔다. 다른 수행자들과 함께 혹독한 고행을 시작했다.
먹는 양을 줄였다. 욕망을 억눌렀다. 몸을 괴롭혔다. 견뎠다. 또 견뎠다.
우리는 이상하게도 고통의 크기와 진심의 크기를 같은 것으로 생각할 때가 있다. 많이 힘들수록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고, 오래 참을수록 성실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운동도 아파야 효과가 있는 것 같고, 공부도 잠을 줄여야 노력한 것 같고, 사랑도 많이 참아야 진짜 사랑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어느 순간 목적보다 고통을 견디는 행위 자체가 중요해진다. 싯다르타 역시 극단적인 고행의 끝까지 갔다.
불교 문헌들은 그의 몸이 심각하게 쇠약해졌다고 묘사한다. 그러나 몸이 거의 무너졌는데도 그가 찾던 해답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중요한 질문이 생겼다. 더 견뎌야 하는가. 아니면 이 방법이 잘못된 것인가. 고통이 크다고 방향까지 옳은 것은 아니다.
이 질문은 생각보다 어렵다. 이미 많은 시간을 썼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고행했다. 다른 수행자들도 함께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그만두면 실패처럼 보인다. 조금만 더 하면 답을 얻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마음에는 이미 투자한 시간과 노력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계속하려는 경향이 있다. 행동경제학과 심리학에서 말하는 ‘매몰비용 효과’와 닮아 있다.
이미 3년을 준비했는데. 여기까지 버텼는데. 돈을 이렇게 많이 썼는데. 십 년을 만났는데. 이 회사에서 청춘을 보냈는데. 지금 그만두면 그동안 한 것이 아깝잖아.
그래서 우리는 과거에 쓴 비용을 되찾기 위해 미래의 시간까지 계속 지불한다. 하지만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 지금 물어야 할 것은 하나다. 여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어왔는가가 아니라, 이 길이 앞으로도 내가 가야 할 길인가.
싯다르타는 결국 고행을 중단했다. 음식을 받아들였다. 불교 전승에서는 수자타라는 여성이 그에게 유미죽과 같은 음식을 공양했다고 전한다.
그는 먹었다. 그릇이 채워졌다. 그 순간을 상상해 본다. 오랫동안 비어 있던 그릇. 따뜻한 음식. 김이 천천히 올라온다. 한 숟가락. 그리고 또 한 숟가락.
몸에 다시 힘이 들어온다. 함께 고행하던 수행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실망해 떠났다고 전해진다. 그들의 눈에는 싯다르타가 포기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여기까지 와서 먹다니. 수행을 버렸군. 실패했군.
하지만 그는 수행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방법을 포기했다.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인생에서는 매우 크다.
목적과 방법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행복해지고 싶은 것은 목적이다. 특정 온라인 게임은 방법일 수 있다. 배우고 싶은 것은 목적이다. 특정 학교는 방법일 수 있다. 사랑하고 싶은 것은 목적이다. 특정 관계를 끝까지 유지하는 것은 방법일 수 있다. 목적을 지키기 위해 방법을 버려야 하는 순간도 있다.
싯다르타가 발견한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가 훗날 ‘중도’라고 불리게 된다. 쾌락에 빠져 사는 길도 아니고, 자신을 파괴할 정도로 괴롭히는 길도 아니다. 중도는 흔히 ‘적당히 살라’는 의미로 오해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양쪽의 극단을 기계적으로 반씩 섞는 타협도 아니다. 무엇이 실제로 괴로움을 줄이고 통찰로 이어지는지를 살피며 적절한 길을 찾는 태도에 가깝다.
그는 한쪽 끝까지 가보았다. 그리고 돌아왔다. 돌아왔기 때문에 다른 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방향을 바꾸는 것은 의지가 약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목적을 방법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뜻일 수 있다.
몸을 회복한 싯다르타는 보리수 아래에 앉았다고 불교 전승은 전한다. 이번에는 몸을 괴롭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편안함만 좇지도 않았다.
앉았다. 호흡했다.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았다. 생겨나는 욕망. 두려움. 집착. 생각. 사라지는 감정. 그는 인간의 괴로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괴로움의 중요한 뿌리 가운데 하나가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기를 요구하는 집착에 있다고 보았다.
사랑하는 것은 변한다. 몸도 변한다. 젊음도 변한다. 관계도 변한다. 나 자신이라고 믿는 모습도 계속 변한다.
우리는 변하는 것을 붙잡고 말한다. 그대로 있어줘. 사라지지 마. 바뀌지 마. 하지만 삶은 대답하지 않는다. 계속 변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은 그래서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다. 변화가 삶의 기본 조건이라는 통찰이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변화 자체만이 아니라, 변하는 것을 영원히 붙잡아두려는 마음일 때가 있다.
그렇다고 내려놓는다는 말을 아무것도 사랑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사람을 사랑해도 된다. 꿈을 가져도 된다. 열심히 일해도 된다. 좋은 것을 오래 지키려고 노력해도 된다. 다만 그것이 반드시 내 뜻대로 되어야만 내가 살아갈 수 있다고 매달릴 때 사랑은 집착이 되고 목표는 감옥이 될 수 있다.
손을 펴는 것과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다르다. 손바닥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고도 손가락을 너무 세게 움켜쥐지 않는 것. 불교의 가르침을 오늘의 언어로 옮긴다면 그런 모습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놓아준다는 것은 소중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소중한 것을 소유하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다는 뜻일 수 있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지는 뒤, 싯다르타는 혼자 머물지 않았다.
오늘날 사르나트로 알려진 곳에서 과거 함께 수행했던 사람들을 찾아가 자신의 깨달음을 전했다고 불교 전승은 말한다. 한때 그를 떠났던 사람들이었다. 그는 괴로움이 존재한다는 것부터 이야기했다.
인생은 아름답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모든 것은 잘될 것이다. 그런 말부터 시작하지 않았다. 괴로움이 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거기에서 끝나지도 않았다. 괴로움에는 원인이 있고, 원인을 이해하면 다른 삶의 가능성이 있으며, 그 길을 연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절망도 아니었다. 막연한 낙관도 아니었다. 현실을 먼저 바라보는 희망이었다.
좋은 위로는 아프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한 뒤에도 갈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싯다르타는 직접 바카라을 남기지 않았다. 그의 가르침은 오랫동안 구전되었고 후대에 여러 불교 전통과 경전으로 정리됐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부처의 말’ 가운데에는 후대의 표현과 해석도 많다.
인터넷에 떠도는 아름다운 문장을 모두 부처의 직접적인 말이라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역사적 싯다르타와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불교 전통은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도 한 장면은 남는다.
극단적인 고행을 하던 사람이 멈추었다.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음식을 먹었다. 화려한 장면이 아니다. 기적도 아니다. 한 사람이 잘못된 방법에서 돌아서는 장면이다. 어쩌면 그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첫 번째 문이었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돌아서야 하는 순간이 있다. 시험을 오래 준비했지만 정말 원하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온라인 게임을 버티고 있지만 몸과 마음이 무너지고 있는 순간. 오래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상처뿐인 관계를 붙잡고 있는 순간. 이미 돈을 많이 넣었다는 이유로 실패한 사업에 더 많은 돈을 넣으려는 순간. 몇 년을 공부했다는 이유로 싫어진 길을 평생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때 사람들은 말한다. 여기까지 했는데 아깝잖아. 조금만 더 버텨. 끝까지 해야지. 물론 쉽게 포기해서는 얻을 수 없는 것도 있다. 어려운 시기를 견뎌야 실력이 생기는 일도 있다.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매번 길을 바꾸면 어디에도 도착하기 어렵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끈기와 포기 가운데 하나를 무조건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질문하는 일이다. 나는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이 길 자체가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인가. 휴식이 필요한가. 방법을 바꿔야 하는가. 아니면 정말 떠나야 하는가.
끝까지 가는 용기와 돌아서는 용기는 서로 반대가 아니다. 둘 다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잊지 않을 때 필요한 용기다.
우리는 끝까지 버티는 사람을 강한 사람이라고 배웠다.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 하고, 오래 견딜수록 대단하며, 돌아서는 것은 실패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처가 되기 전 싯다르타가 보여준 가장 중요한 용기 가운데 하나는 더 오래 굶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방법이 틀렸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다시 먹기 시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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