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내가 벌 수 있는 유일한 돈
시계를 바라본다. 오후 7시 35분이다. 하원하고 온 두 딸과 놀이터에서 놀아주고, 집에 와서 옷 갈아입고, 저녁 먹이고 씻기고 한숨 돌리니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되었다. 둘이서 같이 놀면 조금은 쉴 수 있으련만, 아직은 둘째가 어려서 쉽지는 않다. 서로 원하는 바가 다르다 보니 첫째와는 보드게임을 하며 놀아주고, 그사이 내 품을 파고들어 와 판을 깨는 둘째를 어르고 달래다 보면 혼이 나간다.
요 며칠 와이프는 회사에서 많이 바쁘다. 야근과 회식으로 아이들이 잠든 뒤에야 집에 들어오고 있다. 아직 연락이 없으면 오늘도 많이 늦는다는 뜻일 텐데, 그래도 내 연락에 괜히 더 마음만 급해질까 참고 참다가 문자를 했다. "오늘도 많이 늦어?" "응...... 오늘도 애들 자고 나거나 될 듯 ㅠㅠ" 그럴 줄 알면서, 괜히 보냈다는 후회만 드는 순간이다.
다시 시계를 바라본다. 밤 9시 58분이다. 아이들을 모두 재우고 거실에 나와 어지럽게 흐트러진 거실을 바라본다. 와이프는 조금 전에 들어와서 옷 갈아입고 손발만 씻은 채 소파에 널브러져 있다. 와이프에게 물어봤다. "오늘 많이 힘들었어?" "휴.... 지치네." 그 대답이 내게는 '나 그냥 좀 쉬게 놔둬. 아무 얘기하고 싶지 않아.'로 들려왔다.
오늘 두 딸이 투닥거리다 서로 말리기 바빴던 얘기, 어린이집 선생님께 들었던 아이들의 얘기는 나눌 수가 없었다. 말은 내 안으로 삼키고, 아이들이 어질러 놓은 거실을 말없이 정리한다. 조금 뒤에 돌아보니 와이프는 그대로 잠이 들어 있었다. "들어가서 자." 정리를 마치고, 몇 대 없는 차들이 지나가는 도로를 바라보며, 혼술을 했다.
현타가 몰려온다. 전업주부의 삶을 살면, 결국은 내 일을 덜어줄 수 있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살아야 하는 걸까. 밖에서 일하고 오는, '바깥사람'이 들어오는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 내 모습, 마치 미어캣이 된 것만 같다. 내 삶의 키를 타인에게 넘겨준 것 같은 불안함과 무기력함이 나를 휘감고 지나간다.
첫째의 학원을 마치기를 기다리다, 아이와 함께 학원에 다니는 친구 엄마와 얘기를 나눴다. 최근까지도 맞벌이하던 그 엄마는 며칠 전 일을 그만뒀다고 했다. 이런저런 아이들 얘기를 나누다, 그 엄마가 내게 물었다. "아버님은 일을 아예 쉬시는 거예요? 육아 휴직도 아니고요?" "네. 저는 전업이에요." "아.... 당연히 아빠라 육아 휴직인 줄 알았어요. 근데, 돈벌이 없으면 불안하지 않아요?"
얼마 보지도 않은 이 엄마의 무례함보다도, 이 엄마의 말에서 느껴진 순수한 궁금증에 한 대 맞았다. 내게는 이 말은 '돈 못 버는 아빠는 아빠 자격이 없는 거 아닌가요?'라고 번역되어 내 심장에 와 콕 박혔다. "뭐, 그냥 애들 보는 게 훨씬 더 중요해서 어쩔 수 없죠~ 하하"하고 웃어넘겼지만, 한동안 그 질문은 나를 떠나가지 않고 내게 매일 묻고, 또 물었다.
일하고 있는 남자 친구들은 집에서 주부로 있는 나를 부러워한다. "야, 내 꿈이 주부야." "회사 다니는 거 진짜 너무 스트레스다.. 넌 집에만 있으면 뭐 해?" "... 그러게. 놀고먹나. 하하하." 굳이 주부를 변호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온라인 게임인의 스트레스는 나와는 이제 다른 세상이다. 엄마도 아닌, 아빠도 아닌, 그 어딘가의 경계에서 외줄타기한다.
'슬롯생활 안 하는 아빠는 아빠인가요?' 슬롯에서 통용되는 관념을 나 하나의 힘으로 이겨내기란, 너무도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어떨 땐 다시 슬롯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아 불안하다. 그래서 더더욱 나는 스스로를 다그친다. 뭐라도 만들어내지 않고, 돈이 되는 일을 하지 않을 때마다 더더욱 스스로를 혹독하게 몰아세운다. 너, 뭐라도 해야 해. 그렇게 있으면 안 돼.
오전 9시 40분. 아이들을 내려주고 돌아왔다. 하원까지 남은 시간은 많았다. 와이프는 며칠 동안 애들을 전담으로 본 내가 지쳐 보였는지, 좀 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소파에 가만히 누웠다. '좀 쉬어도 돼. 이번 주 내내 애썼잖아.'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내 안의 다른 내가 말했다. '으이그.... 이 쓸모없는 놈.' 불편한 마음은 나를 일으켜 세웠다. 어제 쓰던 이력서를, 채용 공고 사이트를 돌아봤다. 혹시 파트타임으로 할만한 일이 없을까, 하며. '무슨 일은 일이야. 내 할 일이나 잘하지.' 노트북을 닫았다.
한쪽에 팔려고 내놓은 물건들을 물티슈로 깨끗이 닦는다. 상태는 괜찮은데, 얼마정도 할지 고민한다. 중고나라에까지 올리면 금방 팔리겠지만, 너무 번거롭다. 이내 포기한다. '아이 신발 팝니다.(상태좋음) - 3,000원'. 내가 지금 당장 벌어올 수 있는 유일한 돈이다. 혹시나 채팅을 놓칠까 봐 핸드폰을 소리 모드로 바꿔놓는다.
오후 2시 30분. 집에서 1시간 반 정도 차를 타고 초등학교에 면접을 보러 왔다. 전교생이 30명 정도 되는 농촌에 있는 학교였다. 몇 군데 면접은 이미 떨어졌다. "저희는 학교 경험이 있으신 분들이었으면 좋겠어요." "지금까지 하셨던 이력하고 학교 선생님은 좀 거리가 많이 머네요?"라는 피드백과 함께. 일단 어디서든 발을 뗀 경험이 있어야 한다기에, 이 먼 곳까지 면접을 보러 온 것이다. 1주일 1번인데, 바람 쐬러 온다고 생각하고 다니면 되겠지.
2시 35분, 나는 다시 차에 앉았다. 1시간 반이나 와서 면접을 봤는데, 정말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여기 너무 먼데, 여기까지 다니시는 거 무리 없으시겠어요?" "네, 괜찮습니다." 이 질문이 끝이었다. 이대로 돌아가야 한다니, 이 먼 곳까지 와서라도 새로 시작해 보고 싶던 내 마음은 무너졌다. 기름값이나 겨우 나올 정도의 여기까지 와서 3분짜리 면접을 하고 돌아가다니. 이럴 거면서 왜 오라고 한 걸까.
오후 4시 30분, 지친 마음으로 아이들을 데리러 갔다. 평소보다 첫째가 내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집 앞 놀이터에 아이들을 내려주고, 벤치에 앉아 멍하니 놀이터의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끄럼틀을 타던 첫째가 내 옆으로 슥 다가왔다. "저기 가서 놀아. 무슨 일이니." "아빠, 힘든 일 있어?" "그래 보여?" "응...." 이내 첫째가 나를 꼭 껴안아 줬다. "나는 아빠가 제일 좋아."
마치 아빠가 뭐 때문에 그렇게 힘든지 알기라도 하는 듯, 첫째는 내게로 왔다. 언니가 사라진 걸 뒤늦게 안 둘째는 아빠랑 언니가 안고 있는 걸 보더니 "아빠~" 하고 저 멀리서부터 달려와 둘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기어이 둘은 또 으르렁거렸다. "이놈들아, 다시 가서 놀아. 아빠 괜찮으니까." 어르고 달래 다시 놀이터로 돌려보냈다. 아이들이 참 좋다. 근데, 아이들 때문에 참 힘들다.
또다시 밤이 찾아왔다. 태풍처럼 온 집안을 휩쓸고 지나간 하원 후의 시간. 다행히 오늘은 와이프가 조금 일찍 와서 아이들과 놀아주고, 재우러 들어갔다. 혼자 소파에 앉아, 빠르게 지나가는 차들을 멍하니 바라본다. 육아의 기쁨과 슬픔은 어디서 오는 걸까. 내 삶의 중심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걸까. 나는 언제까지 불안해야 하는 걸까. 누구 하나 내게 알려주지 않는다.
카지노톡에는 간만에 수십 개의 읽지 않은 메시지가 쌓여있다. 엄마들 단톡방이 시끄러웠나 보다. "휴 오늘 애들 왜 이리 말안들음" "나도나도ㅜㅜ 진짜 떠나고싶다" "맨날 지쳐서 다음 달에 시험 준비 어떻게 하지.."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싶었다. 답장을 했다. "그러게.. 다들 고생이야 고생.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