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들의 세계에 불시착한 전업 아빠의 생존법
아직 와이프가 퇴근하기 전인 하원 후,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에 아이들과 함께 집 앞 놀이터로 향했다. 아는 친구가 없어 쭈뼛쭈뼛하던 첫째는 몇 번 놀이터에서 만나기도 한 같은 동에 사는 아이와 수줍게 인사를 주고받고, 조심스레 놀이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둘째는 자유인처럼 나무에 열린 열매도 따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나뭇잎도 줏으면서 자기만의 놀이를 하고 있었다.
바로 옆 벤치에는 엄마들이 삼삼오오 모여 아이들을 보며 웃으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드문드문 들리는 얘기들은 나도 관심이 있는 얘기들이었다. 그 자리에 홀로 서서 민망함에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고 있다 보니, 저 대화에 참여해 보면 어떨지 생각했다. 상상을 해본다. "안녕하세요~ 저기 있는 쟤 아빠예요. 처음 뵐게요." "아, 네..." 잠시 뒤 어색한 침묵과 함께 엄마들이 집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장면을 그려봤다. 혼자 폰만 보는 게 더 낫겠다.
함께 하고 싶은데, 엄마끼리만 느낄 수 있는 연결고리가 있는 거 같아, 내 위치가 더 멀게만 느껴졌다. 높은 곳에서 이 놀이터의 정경을 본다면 섞여서 놀고 있는 아이들, 그리고 그밖에 부모들, 그리고 더 확대해 보면 물 위에 기름 한 방울처럼 내가 보일 것 같았다. 여자 화장실에 잘못 들어가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만 같은 어색함이었다.
놀이터에서 한참을 즐겁게 놀다가 집에 들어온 첫째는 "오늘 놀았던 친구 있자나~ 나 걔랑 더 놀래!"라고 말했다. 일면식도 없는 아이 엄마에게 가서 말을 걸어야 한다니. 긴장해서 말을 거는 나의 모습, 어색한 아이 엄마의 표정, 일순간에 달라지는 공기, 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했다. "아빠, 그 친구 엄마랑 친구 아니야." "그러면 친해지면 되잖아." "... 알았어. 다음에 한번 보자."
한동안 그 아이의 엄마가 놀이터에 나올까 긴장하며 놀이터에 가면 레이더를 켰다. 어떤 날은 다른 엄마들이 너무 많아서 패스, 어떤 날은 말을 걸러 가기에는 스타팅 포인트가 너무 멀어서 패스.. 그러다 드디어 기회가 생겼다. 아이 혼자 놀고 있었고, 아이 엄마는 막 놀이터에 나와서 옆의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이야말로 자연스럽게 말을 걸 기회였다. "날씨가 참 좋죠?" 흠, 너무 상투적이다. "아이들이 참 재밌게 노네요~ 그쵸?" 그러면 아이들이 재미없게 놀겠어? 혼자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그렸다.
그러고 있는데, 막상 그 아이의 엄마가 먼저 내게로 다가와 주셨다. "OO 아빠 되시죠? 반가워요~" 자연스러운 손을 내밀어 준 엄마 덕택에, 시나리오 집필은 거기까지면 됐다. "저번에도 집에 들어와서 OO 얘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아이를 주제로 얘기를 주고받았다. 어디 어린이집에 다니는지, 어디 사는지, 예전부터 아빠 혼자 나오시던데 혹시 어떤 일을 하시는지. 그토록 바라던 그냥 대화였다.
자연스럽게 헤어지고, 그다음부터 놀이터에서 마주치면 나도 덜 긴장하지 않고 편하게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오늘 날씨 참 좋네요~ 애들 놀기 딱 좋은데요?" 스몰토크는 자연스러웠고, 다른 아이 엄마들과 있을 때도 자연스럽게 그 대화에 함께 할 수 있었다. 밖에서 봤을 때는 들어갈 곳 없는 빡빡한 그물 같았지만, 가까이서 본 엄마들의 대화는 느슨한 해먹 같았다.
몇 번의 만남으로 안면을 튼 엄마들 모임에는 게스트처럼 초대를 받기도 했다. "아빠 혼자 있으면 낮에 심심하잖아요. 같이 나와서 밥 먹고 수다 떨러 나와요~" 내게 내려온 동아줄이었다. 엄마들 커뮤니티 근처를 맴도는 사람인 것 같았던 나는, 오랜 기다림 끝에 그 커뮤니티에 들어간 것만 같았다. 육아의 기쁨과 슬픔을 벽 없이 나눌 수 있게 됐다고 느꼈다.
그렇게 애써 커뮤니티의 일원이 됐다고 느낀 뒤, 이제는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아빠가 된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지게 됐다. 근황을 나누다, 자연스럽게 전업주부의 삶에 관해 얘기하게 됐다. "요새 첫째 친구 엄마들하고 자주 만나. 대화도 많이 나누고, 티타임도 자주 하고. 이제는 좀 살 거 같아."
친구들은 진지하게 답했다. "음, 근데, 내가 봤을 때는 아빠가 엄마들하고 친하게 지내는 거, 별로 안 좋아 보여." " 아무리 그래도 남자와 여자잖아.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마." 나도 온라인 게임인이었던 시절이었다면 그렇게 말할 것 같았다. 너무도 평범하고 일반적인 그 의견은, 내가 다가갈 때도 가장 조심스러웠던 이유였다. 하지만 한참을 고민 끝에 손을 내민 내 마음은 남들의 단편적인 눈으로 봤을 땐, 금기의 도전이었다.
"전업주부가 얼마나 외로운지 알아? 매일 혼자야. 게다가 아빠는 어디 얘기할 곳도 없어. 직업적인 관점으로 봐. 일하는데 내가 잘하는지 못하는지도 모르고, 계속되는 반복이 얼마나 힘든데...." "그럴 수 있지. 근데, 그래도 엄마들이랑 너무 친하게 지내는 건 아닌 거 같아. 남녀관계는 어떻게 될지 몰라." "맞아. 난 그래도 애 보면서 육아휴직하고 싶다." 더 이어갈 말도, 힘도 없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나는, 외로웠다. 홀로 내 앞에 있던 술잔을 비웠다.
집으로 돌아와, 가족 모두가 잠든 문을 아무도 방해하지 않게 조심히 열었다. 내일 아이들이 가지고 갈 물통은 아직 어린이집 가방에 그대로 있었다. 혹시나 누가 깰까 봐 물을 가장 약하게 틀어, 조용히, 물통을 씻었다. 방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거실에서 홀로 노래를 들으며 잠을 청했다.
첫째와 같은 학원에 다니며 친해진 한 아이의 엄마는, 시간이 오래 지난 뒤 내게 솔직한 마음을 얘기해주기도 했다. 나를 보며 아빠가 전업으로 육아하는 게 얼마나 힘들까 싶어서 안쓰럽기도 하고, 도움을 주고 싶었다고. 하지만 아빠이기 이전에 남자라, 처음에 내가 먼저 연락했을 때는 조금 조심스럽고 어려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남자다. 그건 변하지 않는다. 엄마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아이 낳을 때의 얘기가 나왔다. "와, 그때 진짜 나 진통 때문에 죽는 줄 알았어." "야, 나는 거의 하루 진통하다가 제왕했어." "와, 나도 제왕했는데, 며칠 동안 내장이 다 튀어나오는 거 같았잖아. 무통 주사 계속 누름." "맞아, 내 와이프도...." 하고 말을 꺼냈다가, 이내 접었다. 그건 내 것이 아닌, 와이프의 것이었다. 벽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르지만, 밖에 있는 나는 그 벽이 너무도 높아 보였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 놀이터에서는 '깍두기'가 있었다. 놀이의 주축인 친구들의 중심에 낄 수 없는 사람, 깁스를 했거나, 나이가 어린 친구들, 에게는 깍두기라는 칭호가 주어졌다. 피구할 때 깍두기는 공을 맞아도 아웃되지 않고 계속 게임에 참여할 수 있으며, 가끔은 이 팀과 저 팀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특권도 주어진다. 어느 쪽도 아니지만, 함께 하고 있다.
하지만 때로는 그렇기에 일종의 완충지대로 존재한다. 엄마들 사이의 복잡한 연결고리에서 나는 끼어들 수가 없다. 그래서 도리어 나에게 더 편하게 얘기를 하고, 복잡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어린이집 행사 때면 힘 약한 나임에도 "아빠니까 이거 좀 해주세요."라고 말씀해 주시는 그 심플함은, 나에게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육아를 하며 여기도 저기도 끼지 못하는 내 정체성을 '깍두기'로 정의하기로 했다. 꼭 '엄마들의 세계'에 완전히 동화되어야 할 필요도, 그렇다고 '아빠들의 세계'도 완전히 이해하지 않아도 됐다. 언제부턴가 항상 누가 있는지 둘러보고 나가던 놀이터에, 그냥 내가 앉고 싶은 자리에 가서 짐을 내려놨다.
'먼저 연락하면 불편해하지 않을까' 고민하던 나를 내려놓고, 필요한 일이 있으면 먼저 연락했다. 도움이 필요할 때는 솔직히 말했다, 도와달라고. 육아를 하다가 어려운 게 있을 때면 "아빠라 잘 모르겠어요." 뻔뻔하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내려놓기 시작하자 언젠가 먼저 연락이 오기도 했고, 편안한 관계들이 자연스럽게 조금씩, 조금씩 생겼다.
얼마 전 아이 친구 엄마들과 너무 답답해 근교에 바람을 쐬러 다녀왔다. 운전석은 나의 몫이었다. 돌아오는 길, 한 엄마가 내게 물어봤다. "근데, 이렇게 낮에 다른 엄마들이랑 바람 쐬러 다녀오면 와이프가 싫어하지 않아요?"라는 질문에, "그럼 남편분은 여기에 아빠 한 명 있는데 뭐라 하지 않나요?"라고 되려 말할 수 있게 되어간다.
오늘도 나는, 조금 낯선 공기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엄마들과 마주할 테다. 놀이터에서 오랜만에 만난 아이 친구 엄마에게 "날씨가 추워서 못 봤네~ 요새 어떻게 지냈어요?"라고, 편하게 안부를 물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