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그 이름
오래전 사랑했던 사람을 다시 만난다면 알아볼 수 있을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면 얼굴도 달라졌을 것이다. 목소리도, 걸음걸이도, 웃는 모습도 조금은 변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기억 속의 그 사람은 절대 늙지 않는다.
그 사람은 언제나 우리가 가장 사랑했던 시절의 얼굴로 남아 있다.
오랜만에 정동길을 걷다가
너의 이름이 떠올라
미아의 시집 《구름 너머 핀 꽃》에 실린 시〈첫 사랑 그 이름〉은 오랜만에 정동길을 걷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길을 걸었을 뿐이다.
그런데 문득 이름 하나가 떠오른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얼굴을 보면서 생각한다.
혹시 너였을까.
정말 너였다면 어땠을까.
그러다 곧 마음을 바꾼다.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우린 이 마음을 오래 바라보게 된다.
보고 싶은데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그리운데 현실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
첫사랑은 때때로 그런 모순된 자리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장소에 기억을 남긴다.
정동길,
마로니에 거리,
그해 여름밤.
한 사람을 기억하면 그 사람만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함께 걷던 거리도 돌아오고,
그날의 공기도 돌아오며,
밤하늘의 별까지 따라온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때의 내가 돌아온다.
아무것도 몰랐던 나.
영원이 정말 존재한다고 믿었던 나.
좋아하는 사람과 하루 종일 걷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충분히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나.
그래서 어쩌면 우리가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특별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사람을 사랑하던 내가 지금의 나와 너무 다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랑을 여러 번 경험하고 나면 우리는 조금씩 영리해진다.
상처받지 않는 법을 배우고,
사람의 마음이 영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랑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현실이 있다는 것도 배운다.
좋아하면서도 거리를 두고,
마음을 주면서도 돌아설 준비를 한다.
어른의 사랑에는 그렇게 경험이 들어간다.
하지만 첫사랑의 기억 속 우리는 다르다.
끝을 모르기 때문에 영원을 믿는다.
그래서 아름답고,
그래서 어리석으며,
그래서 다시는 완전히 돌아갈 수 없다.
미아의 시〈첫 사랑 그 이름〉에서 가장 쓸쓸하게 읽히는 것은 떠난 연인보다 바로 그 사실이다.
첫사랑과 함께 사라진 것은 한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사랑할 수 있었던 한 시절의 나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화자는 그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어 하면서도 만나지 않기를 바랐을까?
어쩌면 기억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 속에서 그 사람은 여전히 별빛 아래 서 있다.
다정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따뜻한 손으로 나를 감싸준다.
그해 여름도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에서 다시 만나는 순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너도 변했고,
나도 변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사랑했던 두 사람은 이제 기억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그래서 어떤 사람은 다시 만나지 않았기에 더 오래 아름답게 남는다.
재회하지 않는 것이 사랑의 실패가 아니라 기억을 기억으로 남겨두는 방법일 수도 있다.
시의 후반부에서 첫사랑은 강물 같은 그리움으로 남는다.
이 표현이 흥미롭다.
강물은 끊임없이 흘러간다.
어제의 물과 오늘의 물은 같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같은 강이라고 부른다.
기억도 비슷하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정확한 장면은 사라진다.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그날 몇 시였는지,
무엇을 입고 있었는지는 흐려진다.
그런데 감정은 그대로 남아있다.
그 사람을 바라보았을 때의 마음.
손을 잡았을 때의 따듯한 체온.
함께 있으면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답게 보였다는 기억.
어쩌면 우리가 오래 간직하는 것은 사건의 정확성이 아니라 그때의 마음이 남긴 그 모습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지막의 ‘아직 끝나지 않은 우리 이야기’를 꼭 재회의 약속으로만 읽고 싶지는 않다.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날 수 있다.
하지만 사랑했던 시간이 우리의 삶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랑 때문에 알게 된 감정이 있고,
그 이별 때문에 달라진 내가 있다.
그리고 지금의 나 안에는 그때 사랑했던 사람의 흔적도 조금은 남아 있다.
그렇다면 사랑은 언제 끝나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만난 날일까.
헤어지자고 말한 날일까.
아니면 더 이상 그 사람을 기억하지 않는 날일까.
어쩌면 어떤 사랑에는 끝이라는 것이 없는지도 모른다.
함께 살아가는 관계로서는 끝났지만,
한 사람의 생애를 이루는 기억으로 계속 살아가는 사랑.
첫사랑은 특히 그렇다.
영원 속에 살아있다.
시〈첫 사랑 그 이름〉을 읽고 나면 이상하게 자신의 기억을 뒤적이게 된다.
우리에게도 그런 기억 속 길이 있었는지.
그 사람과 함께했던 계절은 언제였는지.
지금 우연히 마주친다면 반가울지,
아니면 모른 척 지나가고 싶을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에 도착한다.
지금도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사람을 사랑했던 나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답은 아마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래서 시는 정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오래 닫아두었던 서랍 하나를 열어놓는다.
그 안에는 이름 하나가 있고,
오래된 거리와 계절이 있으며,
지금보다 조금 어렸던 내가 있다고.
미아의 《구름 너머 핀 꽃》에는 그런 기억의 문을 여는 시들이 담겨 있다.
사랑과 작별,
기다림과 그리움,
봄과 가을,
첫눈과 달빛,
그리고 우리가 무심히 지나쳤던 평범한 하루들이 있다.
한 편을 읽다 보면 화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이야기에 도착한다.
그것이 바로 이 시집을 읽는 가장 큰 재미라고 생각한다.
첫사랑을 굳이 잊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잊지 않는 것과 돌아가려는 것은 다르니까.
지나간 사랑을 마음 한편에 간직한 채 지금의 삶을 사랑할 수도 있다.
오히려 그 사람이 있었기에 알게 된 것도 있다.
내가 누군가를 얼마나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인지.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 얼마나 설레고 아픈지.
사랑하는 사람 하나 때문에 평범한 거리가 얼마나 눈부셔질 수 있는지.
그렇다면 첫사랑은 실패한 사랑이 아니라,
한 사람이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깊어질 수 있는지를 발견했던 사건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첫사랑의 이름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 이름 속에는 한 사람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해의 여름,
별빛 아래의 거리,
서로를 바라보며 나누었던 다정한 웃음,
그리고 세상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던 내가 함께 들어 있다.
세월이 흘러 어느 길 위에서 그 이름이 다시 떠오른다면,
잠시 멈추어도 괜찮겠다.
돌아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때의 나에게 조용히 인사를 건네기 위해서.
"잘 지냈니.
그때 정말 많이 사랑했구나!"
그리고 다시 지금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지나간 사랑을 가장 아름답게 기억하는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시집《구름 너머 핀 꽃》은 그렇게 지나간 사람을 다시 데려오기보다, 그 사람을 사랑했던 우리의 마음을 다시 만나게 하는 시집이다.
Image source: Rachel McAdams and Domhnall Gleeson in About Time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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