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너머 핀 꽃
오래 마음속에만 두었던 문장들이 있었다.
어떤 것은 사랑이었고,
어떤 것은 그리움이었으며,
어떤 것은 이름조차 붙이지 못한 채 지나간 하루였다.
길을 걷다가 문득 보았던 민들레 한 송이.
창문에 이마를 기대고 바라보았던 노을.
늦은 밤 혼자 걸었던 산바카라길.
첫눈이 내리면 떠오르던 사람.
그리고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계절이 돌아오면 다시 생각나는 이름들.
그런 순간들을 오래 마음에 적어두었다.
거창한 이야기를 쓰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작아서 쉽게 지나치는 것들을 잊고 싶지 않았다.
바람이 불던 방향,
낙엽이 발밑에서 부서지던 소리,
공원 벤치에 길게 누워 있던 가로등의 그림자,
잘려나간 잔디 사이에서 다시 고개를 든 작은 풀.
그 순간에는 별것 아니었던 풍경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상하리만큼 기억에 남는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도 대부분 그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특별한 날은 많지 않았다.
대신 평범한 날이 아주 많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된다.
그 평범했던 날들이 사실은 우리가 살아낸 생애였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그날들을 시로 남기고 싶었다.
그렇게 모인 문장들이 한 권의 바카라이 되었다.
첫 시집의 제목은 《구름 너머 핀 꽃》이다.
구름이 없는 삶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흐린 날을 지나간다.
사랑이 끝나기도 하고,
기다리던 사람이 오지 않기도 하며,
오래 믿었던 것이 무너지기도 한다.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이 희미해지고,
반대로 잊고 싶은 기억은 오래 남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삶은 그곳에서 끝나지 않는다.
겨울이 끝난 자리에서 다시 꽃이 피고,
한 사람을 떠나보낸 뒤에도 우리는 다른 누군가의 안부를 묻는다.
마음이 무너졌던 날 다음에도 아침은 오고,
우리는 또 하루를 살아간다.
그래서 ‘구름 너머 핀 꽃’이라는 제목에는 거창한 희망보다 조금 작은 믿음을 담고 싶었다.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흐린 날에도 어딘가에서는 무엇인가 다시 자라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 정도의 희망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영화를 보고, 바카라을 읽고, 영문학을 번역하며 오랫동안 문장을 가까이해 왔다.
영화 속 한 장면을 오래 바라보고,
소설 속 한 문장을 몇 번씩 되새겨 읽으며,
한 언어의 마음을 다른 언어의 문장으로 옮기는 일을 좋아했다.
네이버 블로그와 온라인카지노에서는 영화와 문학에 대한 비평과 번역, 그리고 시를 꾸준히 써왔다.
그 시간 동안 문장에 대해 한 가지를 배웠다.
많이 말한다고 마음이 더 잘 전달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때로는 짧은 문장 하나가 긴 설명보다 오래 남는다는 것,
그리고 좋은 문장은 결국 사람을 다시 자기 삶으로 돌려보낸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다가 자신의 사랑을 떠올리고,
바카라을 읽다가 오래전 자신의 모습을 만나며,
시 한 편을 읽고 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하늘을 한번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런 글을 좋아한다.
이번 시집에서도 가능한 한 그런 문장을 쓰고 싶었다.
읽고 난 뒤 시만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삶에서 어떤 장면 하나가 함께 떠오르는 시를 쓰고 싶었다.
《구름 너머 핀 꽃》에는 여러 계절이 있다.
봄도 있고,
여름도 있고,
가을과 겨울도 있다.
〈봄 풍경〉이 있고,
〈가을편지〉가 있으며,
〈첫눈이 내리면 말할 거야〉가 있다.
〈봄비〉,
〈봄날〉,
〈벚꽃과 눈꽃 사이〉도 있다.
계절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를 굳이 설명하자면,
사람보다 계절이 기억을 더 정확하게 불러오는 순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을 날짜로 기억하지 않는다.
어떤 봄으로 기억하고,
어떤 여름의 향기로 기억한다.
그 사람과 함께 걸었던 가을길,
헤어진 뒤 처음 맞았던 겨울,
문득 보고 싶어 졌던 첫눈.
사랑은 사람에게만 남지 않는다.
계절 속에도 남는다.
그래서 어느 날 바람이 불면 이유 없이 한 사람이 생각나고,
꽃이 피면 이미 오래전의 일이 된 사랑이 다시 떠오른다.
시집 속 계절들은 그런 기억을 품고 있다.
사랑에 대한 시도 많다.
〈첫 사랑 그 이름〉,
〈사랑 그리고〉,
〈고백〉,
〈영원의 사랑〉,
〈사랑이 오면〉,
〈그대라는 계절〉,
〈봄, 짝사랑〉,
〈그대〉,
〈그래도 우리〉.
하지만 , 사랑을 아름답게만 쓰고 싶지는 않았다.
사랑에는 설렘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다림도 있고,
망설임도 있으며,
떠나보내는 일이 있다.
그래서 〈작별〉이 있고,
〈그리움 끝자락〉이 있으며,
〈우리가 아니었던 시간〉과
〈잊는 연습〉도 있다.
사랑했던 사람을 잊고 싶으면서도 잊고 싶지 않은 마음,
다시 만나고 싶지만 다시 만나면 안 될 것 같은 마음,
그리고 다 끝났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떤 계절만 오면 되살아나는 마음이다.
사람은 그렇게 모순된 감정을 안고 살아간다.
나는 그 모순을 억지로 정리하고 싶지 않았다.
시는 정답을 주는 문장이 아니라,
때로는 마음이 복잡한 채로 존재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언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시집 《구름 너머 핀 꽃》에서 특히 아끼는 작품 가운데 하나가 〈밤산바카라〉이다.
우연히 걷던 밤길에서 시작된 시다.
더운 바람과 나무 그늘,
노을,
얕은 파도,
벽시계,
아스팔트,
공원의 벤치,
가로등의 그림자,
넘어진 자전거.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은 것들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것들을 자주 기억한다.
오히려 아주 중요한 날보다 별일 없었던 밤이 오래 남을 때가 있다.
그래서 〈밤산바카라〉에는 이런 마음을 적었다.
소중한 것을 계속 좋아할 수 있기를,
아름다운 것을 잊지 않을 수 있기를,
그리고 사소한 것들로 자신을 가득 채울 수 있기를.
살아갈수록 이 소원은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점점 많은 것에 익숙해진다.
처음에는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풍경을 나중에는 보지 않는다.
오래 곁에 있는 사람을 당연하게 여기고,
한때 좋아했던 것을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계속 좋아하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던 꽃을 계속 좋아하고,
좋아하는 음악 앞에서 여전히 마음이 움직이고,
봄이 왔을 때 꽃이 피었다는 사실을 한 번 더 바라보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오래 곁에 있어도 그 사람의 소중함까지 익숙해지지 않는 것.
그런 마음으로 쓴 시가 〈밤산바카라〉이다.
시집의 마지막까지 따라가다 보면 바람과 달, 꽃과 햇살, 창가와 산바카라길 같은 말들이 반복해서 나온다.
새로운 단어는 아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시 속에 있던 말들이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익숙한 말을 좋아한다.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세계도 대부분 익숙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낯선 세계를 보여주는 시도 좋지만,
나는 익숙한 세계를 다시 보게 하는 시를 쓰고 싶었다.
늘 지나던 길인데 어느 날 다르게 보이는 순간,
늘 있던 사람인데 문득 고마워지는 순간,
그리고 평범한 하루였는데 지나고 나서 가장 그리운 날이 되는 순간이다.
시는 어쩌면 그런 순간을 붙잡는 일인지도 모른다.
《구름 너머 핀 꽃》은 한 번에 다 읽기보다 가까운 곳에 두고 천천히 읽어도 좋은 바카라이었으면 한다.
비 오는 날에는 〈봄비〉를 펼치고,
누군가가 그리운 날에는 〈그리움 끝자락〉을 읽고,
잊고 싶은 사람이 있는 날에는 〈잊는 연습〉을 찾아가고,
첫눈이 내리는 날에는 〈첫눈이 내리면 말할 거야〉를 펼쳐보는 식으로,
그리고 별일 없던 저녁에는 〈밤산바카라〉을 읽어도 좋겠다.
모든 독자가 같은 시를 좋아하지 않아도 좋다.
오히려 각자 자신의 시를 한 편씩 발견했으면 한다.
누군가에게는 〈첫 사랑 그 이름〉이 그런 시가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노란 나비〉가,
누군가에게는 〈빈자리의 의미〉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래도 우리〉가 될 수 있다.
시집은 작가가 쓰지만,
한 편의 시가 정말 완성되는 것은 독자가 자신의 기억을 그 안에 놓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바카라을 내놓고 나니 미묘한 마음이 든다.
그동안 혼자 가지고 있던 기억들이 이제는 내 것만이 아니게 되었다.
누군가가 읽고,
자신의 사랑을 떠올리고,
자신의 계절을 겹쳐볼 것이다.
어떤 시는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의미로 읽힐지도 모른다.
그것이 조금 두렵기도 하고,
또 많이 기대되기도 한다.
그래도 시가 세상에 나가는 일은 결국 그런 것이리라.
내 마음에 있던 것을 누군가의 마음 가까이에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일,
그리고 그 사람이 필요할 때 잠시 펼쳐볼 수 있도록 두고 오는 일이 아닐까.
나는 이 시집이 누군가의 삶을 바꾸는 거창한 바카라이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보다 조금 작은 것을 바란다.
지친 하루 끝에 한 편을 읽고 마음이 잠시 편안해지는 것,
오래 잊고 있었던 사람을 따뜻하게 한번 떠올려보는 것,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
그리고 지금 곁에 있는 사람에게 조금 더 다정해지는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좋은 시가 우리에게 할 수 있는 일도 어쩌면 그 정도라고 생각한다.
세상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을 아주 조금 바꾸는 것이다.
시집의 제목처럼 삶에는 구름이 있다.
때로는 앞이 잘 보이지 않고,
오래 기다려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
사랑했던 사람은 떠나고,
계절은 너무 빨리 지나간다.
그러나 나는 아직 꽃을 믿고 싶다.
크고 화려한 꽃이 아니어도 된다.
아무도 보지 않는 길가에서 혼자 고개를 들고 있는 작은 민들레 한 송이면 충분하다.
잘려나간 잔디 사이에서 다시 올라온 토끼풀도 좋다.
누군가에게는 그 작은 꽃 하나가 다시 걸어갈 이유가 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이 바카라의 마지막 마음은 결국 희망이다.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는 낙관이 아니다.
슬픈 일을 겪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도 아니다.
그저 슬픔이 있다고 해서 삶 전체가 슬픔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믿음,
떠난 사람이 있다고 사랑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믿음,
또 오늘이 흐리다고 내일의 꽃까지 피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믿음이다.
그 마음을 한 권에 담았다.
미아의 첫 시집 《구름 너머 핀 꽃》이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에게,
계절이 바뀔 때마다 누군가를 떠올리는 사람에게,
사소한 것들을 오래 좋아하고 싶은 사람에게,
그리고 오늘 조금 지쳐 있는 사람에게,
아주 작은 꽃 한 송이처럼 다가갈 수 있다면 좋겠다.
언젠가 한 페이지를 읽다가 문득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면 더 좋겠다.
나에게도 아직 좋아할 것이 남아 있다고.
아름다운 것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그리고 구름 너머 어딘가에서,
나의 꽃이 계속 피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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