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날은 지나가기도 전에 기억이 된다

어떤 날의 기억

by미아




어떤 날은 지나가기도 전에 기억이 된다




이상하게 오래 기억나는 밤이 있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것도 아니고, 오래 기다렸던 사람을 만난 것도 아니다.

그저 잠이 오지 않았고, 창문 밖을 오래 바라보았으며, 평소와 다르지 않은 바람에서 어쩐지 봄 냄새가 났던 밤.

그런 밤이 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우리는 문득 깨닫는다.

내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은 어떤 사건이 아니라, 그날의 마음이었다는 것을.


미아의 시〈어떤 날의 기억〉은 그런 밤에서 시작한다.


겨울의 끝자락,

아직 이른 어느 봄밤


이 두 행이 인상적이다.

완전한 겨울도 아니고 완전한 봄도 아니다.

겨울은 떠나고 있지만 아직 조금 남아 있고, 봄은 오고 있지만 아직 충분히 무르익지 않았다.

사랑도 때때로 그렇게 시작된다.

좋아한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이르고, 아무 마음도 아니라고 하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린 순간이 있다.

우리는 그 중간 어디쯤에서 한 사람을 생각한다.

사랑은 계절보다 조금 먼저 온다.

화자가 바라보는 창문 밖에는 별이 하나둘 피어난다.

별이 ‘뜬다’ 거나 ‘반짝인다’고 하지 않고 ‘피어난다’고 한다.

그래서 밤하늘이 어느 순간 커다란 봄의 정원처럼 느껴진다.

별이 피어나고,

새싹이 움트고,

봄 향기가 밀려오고,

풀 향기가 바람에 스친다.

세계가 조금씩 조금씩 깨어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정말 달라진 것은 계절뿐일까?

어쩌면 달라진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인지도 모른다.

사랑하기 전에도 별은 있었고 바람은 불었다.

공원에는 풀이 있었고 봄이면 새싹이 돋았다.

그런데 한 사람을 기다리기 시작하면 평범했던 것들이 갑자기 특별해진다.

별 하나가 오래 눈에 들어오고,

바람의 냄새를 맡게 되고,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밤길을 걷고 싶어진다.

사랑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을 먼저 바꾸는 것인지도 모른다.


잠들지 못하는 마음

시에서는 같은 문장이 몇 번이고 돌아온다.


잠 못 이루는 이 밤



처음에는 단순히 설레서 잠들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반복될수록 마음은 조금씩 앞으로 간다.

봄을 느끼던 마음은 어느 순간 ‘너’를 생각하고, 너를 생각하던 마음은 꽃잎처럼 흔들리고, 결국 현실에서는 아직 만나지도 않은 사람과 마음속에서 벌써 마주 앉아 꽃차를 마신다.

밤은 제자리에 있는데 마음만 계속 앞으로 가고 있다.

사랑을 기다릴 때 우리의 시간이 꼭 그렇다.

몸은 아직 오늘에 있는데 마음은 자꾸 내일로 간다.

다음 만남을 생각하고,

어떤 이야기를 할지 상상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장면 속에서 먼저 웃어보기도 한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기다림은 단순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 아니다.

그 안에서는 이미 수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달려가고 싶은데, 멈추게 되는 마음도 있다.

이 시가 설렘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면 아마 조금 평범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오히려 짧은 흔들림이었다.

화자는 아무도 없는 공원길을

“내달리다 멈춰”

선다.

달리고 싶다.

그런데 멈춘다.

좋아하는 마음도 그렇다.

한없이 가까이 가고 싶다가도 문득 두려워진다.

혹시 나만 이런 마음이면 어쩌지.

그 사람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내가 읽은 그 사람의 표정은 정말 같은 마음이었을까.

그래서 조금 뒤 화자는 묻는다.


미처 못 읽은 너의 마음일까



자신의 마음은 이렇게 분명한데 상대의 마음은 읽을 수 없다.

아마 사랑이 우리를 가장 설레게 하면서 동시에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두 사람의 일이지만 우리는 결국 한 사람의 마음밖에는 완전히 알 수 없으니까.


그리고 아직 사랑하지 않았는데 벌써 그립다.

이 시에는 내가 오래 들여다보게 된 말이 하나 있다.

‘설익은 그리움’.

참 이상한 말이다.

그리움은 대개 지나간 사람에게 생기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직 제대로 시작되지도 않은 사랑이 벌써 그립다.

그래서 ‘설익은’이라는 말이 마음에 남는다.

아직 충분히 익지 않은 마음.

사랑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이르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 커져버린 마음.

어쩌면 사람은 사랑한 뒤에만 그리워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순간부터 이미 그리움은 시작될 수 있다.

보고 싶다는 마음속에는 이미 부재가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지금 여기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기다린다.

그래서 어떤 사랑에는 사랑보다 그리움이 먼저 찾아온다.

마음은 현실보다 먼저 사랑한다.

시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장면은 아마 이 부분일 것이다.

화자의 마음은


벌써 너와 마주 앉아 꽃차를 마신다


아직 만나지 않았는데,

‘벌써’ 함께 앉아 있다.

그 한 단어 때문에 현실의 시간과 마음의 시간이 갈라진다.

현실의 나는 혼자 방 안에 있다.

그러나 마음속의 나는 이미 당신 앞에 앉아 있다.

사랑은 가끔 그렇게 현실보다 빠르다.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 이미 만남을 살아보고, 아직 시작되지 않은 관계 속에서 먼저 행복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기다리는 동안 만들어낸 미래 역시 우리의 삶에서 완전히 허구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그 순간 내가 느낀 설렘은 진짜였으니까.

어떤 날은 지나가기도 전에 추억이 된다.

이 시〈어떤 날의 기억〉를 끝까지 읽고 나면 제목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어떤 날의 기억'

독특하다.

시는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화자는 계속 ‘이 밤’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누군가를 만날 것을 기다린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 밤은 영영 잊히지 않을 ‘기억’이 된다.

아직 지나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기억이 된 것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이 시가 단순한 봄밤의 사랑시를 넘어선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때때로 어떤 순간을 살아가면서 알게 된다.

아, 나는 오늘을 오래 기억하겠구나.

아직 그날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런 예감이 드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 우리는 현재를 살면서 동시에 먼 훗날의 자신이 되어 지금을 바라본다.

언젠가 오늘을 떠올릴 나.

언젠가 이 밤의 공기와 냄새를 그리워할 나.

그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와 잠시 겹쳐진다.

그래서 어떤 순간은 지나간 뒤에 추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순간부터 이미 추억이 된다.

우리가 사랑할 때 정말 달라지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이 시에서 ‘너’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다.

어떤 사람인지,

어떤 얼굴인지,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도 시는 한 사람의 사랑을 충분히 보여준다.

왜일까?

이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사랑받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고 있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변화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자 별이 꽃처럼 피어난다.

새싹의 움직임에서 소리가 들린다.

풀 향기를 베고 눕고 싶어진다.

마음은 꽃잎처럼 흔들린다.

그리고 혼자 있는 방 안에서 아직 만나지 않은 사람과 꽃차를 마신다.

사랑이 바꾼 것은 세상이 아니다.

그 세상을 바라보는 한 사람이다.

그래서 사랑은 어쩌면 한 사람을 발견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다시 발견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평범했던 하루가 특별해지고,

늘 보던 별이 아름다워지고,

아무 의미 없던 봄바람 하나가 오래 기억된다.

한 사람 때문에

기억하고 싶은 삶이 된다.

우리는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거창한 사건들로 기억할 것 같지만, 실제로 마음에 오래 남는 것은 의외로 사소하다.

어느 날의 향기.

창가에 들어오던 빛.

함께 마셨던 차 한 잔.

누군가를 기다리며 걷던 길.

그리고 그날 내가 느꼈던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


〈어떤 날의 기억〉은 그런 사소한 순간을 붙잡는다.

아직 사랑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어쩌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날의 마음은 이미 충분히 아름답다.

사랑은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의미가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동안 내가 조금 더 섬세한 사람이 되었고, 평범한 세계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으며, 별과 바람과 새싹을 이전과 다르게 바라보았다면 그 시간 역시 이미 나의 삶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시의 제목을 오래 생각하게 된다.


"어떤 날의 기억"


어쩌면 좋은 삶이란 특별한 날만을 기다리는 삶이 아니라 이런 ‘어떤 날’을 알아보는 삶인지도 모른다.

지금 내 곁을 지나가는 작은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는 것,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동안의 마음을 소중히 여기는 것,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내일 때문에 오늘의 설렘을 흘려보내지 않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오늘뿐이니까.

그리고 오늘이 지나고 나면,

우리가 그렇게 사랑했던 평범한 순간들이 하나둘 모여

우리의 생애가 된다.

어떤 날은 지나가야 비로소 기억이 된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그 순간을 살아가는 동안 이미 알게 된다.

이 밤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하겠구나.

그렇게 한 사람을 기다리던 평범한 봄밤 하나가,

어느새

우리 삶에서 영영 사라지지 않는

‘어떤 날의 기억’이 된다.




당신에게도 잊히지 않는


‘어떤 날의 기억’이 있나요?







Image source: Serenity(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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