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카라 리뷰
<아우스터리츠> W.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2026 초판15쇄. (주)을유문화사
(이 글에 올린 바카라 이외의 이미지는 바카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리뷰를 쓰면서 찾은 별도의 이미지입니다. 제가 바카라을 읽는 중에 궁금한 장소, 건물, 인물, 사건들을 조회하여 독서의 이해를 돕는 습관입니다.)
이 소설은 조금 독특한 형식을 취한다. 일반적인 1인칭 소설도, 전지적 작가 시점의 소설도 아니다. 주인공인 아우스터리츠가 자신의 삶을 직접 들려주는 자전적 고백이 아니다.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 화자 '나'가 우연한 만남을 통해 아우스터리츠를 알게 되고, 여러 해에 걸쳐 그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한다. 독자는 화자의 목소리를 따라가지만, 안에는 다시 아우스터리츠의 목소리가 흐른다.
그 목소리 역시 다시 오래된 사진과 문서, 기억과 역사 속에서 흘러나온다. 이처럼 여러 겹의 목소리가 서로를 이어받으며 흘러가는 방식은, 나에게 바흐의 푸가를 연상시켰다. 흩어진 기억의 선율들이 서로를 뒤쫓으며 거대한 역사의 슬픔을 연주한다. 기억의 파편들은 푸가 기법처럼 대위법적으로, 또한 흑백 사진의 반복과 긴 문장을 통해 음악적 선율로 작동하며 과거와 현재를 겹쳐낸다.
작가는 왜 아우스터리츠에게 직접 소설을 쓰게 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홀로코스트 이후에는 "나는 기억한다."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은 너무 상처 입었고,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기억은 반드시 누군가에게 말해지고, 그 말을 다른 누군가가 받아 적어야만 한다. 기억은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아우스터리츠>의 중요한 메세지이기도 하다.
벨기에 도시 안트베르펜으로 목적 없이 여행을 떠난 이름 없는 화자 "나"가 화려한 기차역 대합실에서 우연히 한 남자를 만난다. 그는 아우스터리츠, 건축물과 형태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서유럽 곳곳을 여행하며 건축물을 조사하고 사진으로 담아낸다.
자크 아우스터리츠는 제2차 세계대전 직전 '킨더트랜스포트(Kindertransport, 어린이 수송열차)'를 통해 체코에서 영국으로 보내진 아이였다.
1938년부터 1939년 사이 약 1만 명의 유대인 어린이들이 부모와 헤어진 채 영국으로 피신했지만, 많은 부모들은 끝내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작가 제발트는 역사적 사건을 재현하기보다, 기억이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평생 흔드는지를 조용히 따라간다.
킨더트랜스포트는 역사바카라에서는 몇 줄로 정리되는 사건이다. 제발트는 그 몇 줄 속에서 평생 자신의 이름과 부모의 얼굴을 잃어버린 한 사람을 바라본다. 역사는 숫자를 기록하지만, 소설은 한 사람의 기억을 복원한다. 소설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우스터리츠>는 기억하는 방식을 바꾸어 놓는다.
1939년 2월, 유대인 킨더트랜스포트(Kindertransport) 어린이들이 런던에 도착하는 모습.
사진: Gamma-Keystone via Getty Images
바카라을 펼치고 조금 지나면 좀 어리둥절하다. 이상하다. 주인공도 명확하지 않고, 대화인지 회상인지도 모호하다. 문장이 끝나지 않을 정도로 길며, 사진은 설명도 없이 끼어 있다.
이야기와 그 안에 묘사된 사건들은 예측할 수 없이 앞뒤로 오간다. 그러나, 소설 속 모든 것은 치밀하게 계획되어 있다. 우연에 맡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세부 사항은 이야기 후반부에서 제자리에 다시 나타난다. 소설 초반부에서 화자는 독자에게 안트베르펜의 옛 방어벽과 노동자들이 거주하던 주택 단지를 묘사한다. 당시에는 알지 못하지만, 이러한 즉흥적인 묘사는 사실 소설 후반부에 더욱 불길한 모습으로 등장할 건물들을 예고하는 복선이다. 건물, 별, 그림, 사막의 텐트까지, 제발트의 작품에서는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고 있다.
독자는 자꾸 길을 잃지만 여러 페이지를 읽어가면서 차츰 깨닫게 된다. 작가는 독자가 길을 잃기를 의도했다는 것을. 왜냐하면 아우스터리츠 역시 평생 자신의 기억 속에서 길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과는 다른 홀로코스트 이야기이며, 사실 바카라의 절반이 지나서야 비로소 홀로코스트 이야기인지 확신할 수 있다.
바카라을 덮고 나면, 한 남자의 슬픈 눈망울과 안개 낀 기차역의 풍경이 잔상처럼 남는다. 왜 이 소설은 직선적으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고, 수많은 사진과 길고 긴 문장들로 우리를 헤매게 할까?
제발트에게 기억은 연대순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한 장면이 다른 장면을 부르고 사진 하나가 수십 년 전을 불러오고 건물이 어린 시절을 끌어낸다. 이 소설은 추리소설처럼 앞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나선형 속으로 들어간다. 바카라의 초반부는 줄거리나 이야기의 전개가 너무 동떨어져 있어 어리둥절하다. 하지만 느리게,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면서 나치의 만행이 천천히, 꾸준히 다가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화자는 아우스터리츠가 말하고 있음을 자주 상기시키며 독자를 서술되는 사건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한다. 실제로 여러 부분에서 우리는 3차, 심지어 4차 정보를 얻게 되는데, 예를 들어 서술자는 아우스터리츠가 베라라는 인물이 들려준 이야기를 다시 전하고, 베라는 또 막시밀리안이라는 사람이 한 말을 전하는 식이다.
작가 제발트의 문체에서 또 다른 특징은 '러시안 인형(마트료시카)'처럼 문장 안에 또 다른 문장이 겹겹이 쌓여가는 구성이다. 세부적인 내용들이 겹겹이 쌓여가다 보면 어디서, 왜 그 아이디어가 시작되었는지 기억하기조차 어려워진다. 나는 읽던 페이지에서 이미 읽었던 페이지로 되돌아가 다시 훑어보며 이야기의 시작을 찾곤 했다.
그녀가 내가 태어나자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몇 년 동안 유모 역할을 맡기로 자청했다고 베라가 말했다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172쪽
야식을 차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 것이 내게는 가장 중요했다고 베라가 말했다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173쪽
<아우스터리츠>를 읽는 동안 나는 줄거리를 따라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음악을 들은 것 같았다. 한 번 제시된 선율이 다른 목소리에서 다시 시작되고, 잊힌 줄 알았던 음이 다시 떠오르는 바흐의 푸가처럼, 이 소설도 같은 기억을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되돌려 보낸다. 사진과 건축, 기차역과 폐허, 어린 시절과 역사적 비극은 반복되지만 결코 같은 의미로 돌아오지 않는다. 기억은 직선이 아니라 서로를 부르는 여러 개의 목소리였다.
루카스 반 발켄보르흐 <얼어붙은 슈헬데 강이 있는 안트베르펜 풍경> 1593. 패널에 유채, 42.5x63.5cm. 슈테델미술관, 프랑크프루트, 독일
위의 그림 오른쪽 아래.
바카라에는 이 그림에 대하여 아우스터리츠의 생각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물론 바카라에 이 그림이 나온 것은 아니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림을 함께 올린다.)
우리는 과거를 지나간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이 바카라을 읽고 나면 과거는 사라진 시간이 아니라, 아직도 현재를 살아가는 또 하나의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루카스 반 발렌보르흐에 의해 그려진 그 순간이 결코 지나간 것이 아니라, 카나리아 같은 노란색 옷을 입은 부인이 방금 쓰러졌거나 기절했으며, 그녀의 검은 우단 머릿수건은 머리에서 지금 막 옆으로 굴러떨어지고, 대부분의 관찰자들이 분명히 간과했을 이 작은 불행이 반복해서 다시 일어나는 것처럼, 그리고 어떤 것에 의해서도 결코 멈추지 않고, 그 누구에 의해서도 회복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18쪽.
그림 속 이러한 장면은 겨울 빙상 놀이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아우스터리츠의 이 그림 감상평을 한 페이지나 할애하며 자세히 서술한 것은 무슨 의도일까?
인간의 경험과 비극이 시대를 초월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특정한 순간들이 우리의 집단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아우스터리츠의 관찰은 역사와 현재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며, 고통이 시간을 초월하여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역사는 정적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 안에 항상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이다.
시계는 시간을 측정하고, 사진은 시간을 붙잡으며, 건축은 시간을 견딘다.
안트베르펜 중앙역에서 처음 만난 화자와 아우스터리츠가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대기실의 거대한 시계는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끊임없이 움직인다. 이 시계는 단순히 시간을 알려주는 장치가 아니다. 인간의 노력과 이동, 만남과 이별을 지배하는 시간의 힘을 섬뜩하게 드러낸다.
대화 중에 나타난 침묵의 시간 동안 우리 두 사람은 1분이 지나는 데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알게 되었고,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미래에서부터 한 시간의 60분의 1을 떼어낼 때마다 형리의 칼과 비슷하게 보이는 이 바늘의 움직임이, 사람의 심장을 멎게 할 정도로 위협적인 떨림이 얼마나 끔찍한 지를 알아차렸다. 13쪽
여기서 시간은 고르게 흐르지 않는다. 침묵 속의 1분은 한없이 길어지지만, 시곗바늘은 갑작스럽고 위협적으로 다음 순간을 잘라낸다. 특히 바늘을 ‘형리의 칼’에 비유한 표현은 시간을 중립적인 자연 현상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분할하고 소진시키는 폭력적인 힘으로 보게 한다. <아우스터리츠>에서 시계의 시간과 인간 내면의 시간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시계는 앞으로 나아가지만, 기억 속의 시간은 멈추고 되돌아오며 때로는 수십 년을 건너뛴다.
시간이란 인간의 모든 발명들 중에서 단연 가장 인위적인 것이며, 자신의 축을 자전하는 행성들과의 연관성에서 보면 어떤 계산보다도 훨씬 더 자의적인 것으로, 우리가 스스로를 맞추는 태양일은 정확한 척도를 제시라 수 없는 까닭에 시간 측정이란 목적을 위해서도 운동속도가 변하지 않고 113쪽
아우스터리츠의 시간 개념에 대한 논평은 우주의 심오한 존재 앞에서 시간의 자의성을 지적하며, 이 개념에 대한 기존의 이해에 이의를 제기한다. 우리가 삶을 어떻게 측정하고 그 측정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도록 이끈다. 단순히 시간을 세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을 더욱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도록 촉구한다.
사진은 <아우스터리츠>를 이루는 중요한 모티프다. 사진에 매료된 것은 기억과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은유로 작용한다. 아우스터리츠가 간직하거나 우연히 발견한 사진들은 사라진 사람과 장소의 흔적을 붙잡는다. 텍스트 사이에 삽입된 사진들 또한 이야기를 설명하는 삽화라기보다, 말로는 완전히 복원할 수 없는 과거의 흔적처럼 놓여 있다.
사진작업에서는 현실의 그림자가 무에서부터 감광지에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항상 나를 사로잡았는데, 그것은 한밤중에 내 속에서 떠오르다가 붙잡으려하면 너무나도 빨리 사라져 버리는 기억처럼, 오랫동안 현상 욕조에 담가둔 인화지와 다름없었어요,라구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87-88쪽
어둠 속에 잠겨 있던 인화지에서 서서히 형상이 떠오르는 과정은 망각 속에 묻혀 있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과정과 닮아 있다. 그러나 사진은 잃어버린 과거를 온전히 되돌려주지 않는다. 사진 속 인물과 장소는 분명 눈앞에 존재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사진은 기억의 증거인 동시에, 기억할 수 없는 것의 흔적이다.
아우스터리츠가 사진에 매료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사진은 기록되지 않았다면 사라졌을 사물과 찰나를 보존하지만, 그 안에 담긴 삶 전체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아우스터리츠』에서 사진은 과거를 재현하는 완전한 기록이라기보다, 현재의 우리를 사라진 세계 앞으로 데려가는 작은 문과 같다. 우리는 그 문을 통해 과거를 들여다보지만, 끝내 그 안으로 완전히 들어갈 수는 없다.
By Trougnouf - CC BY 4.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71843511
<아우스터리츠>에서 건축은 배경이 아니다. 건물은 시간을 품고 있는 기억의 그릇이다. 아우스터리츠는 오래된 요새와 도서관, 기차역을 바라보며 돌과 벽돌의 아름다움을 말하지 않는다. 그 안에 축적된 시간과 사라진 사람들의 흔적을 읽어낸다. 아우스터리츠의 건축 기행은 여행이 아니라 기억을 발굴하는 작업처럼 보인다.
특히 안트베르펜 중앙역은 이 소설을 대표하는 공간 가운데 하나다. 웅장한 돔과 대합실은 수많은 사람들의 만남과 이별을 지켜본 장소이다.
로마 판테온에서 신들이 방문객을 내려다보던 그런 높은 자리에 안트베르펜 정거장의 위계질서에 따라 배열된 19세기의 성스러운 것들, 이를테면 광산, 공장, 교통, 무역과 자본은 그 양식과도 잘 어울리지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을 이었다. 16쪽
역은 늘 이동을 전제로 하지만, 아우스터리츠에게는 떠남 이전의 삶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운명을 상징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건축은 돌로 지어진 구조물이 아니라 시간을 보관하는 기억의 저장소가 된다.
<아우스터리츠>를 읽고 나면 오래된 건물은 더 이상 관광지가 아니다. 벽에는 사람이 남긴 시간이 스며 있고, 시간은 기억을 잃은 한 사람을 다시 과거로 이끈다. 작가 제발트는 건축을 통해 역사를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가 어떻게 공간 속에 침묵한 채 남아 있는지를 보여준다.
개인에게도 그렇지 않은가. 특정 장소나 건물을 생각하면 그곳의 모양새뿐 아니라 함께 했던 사람, 거기서 있었던 일, 그런 것들이 떠오른다. 거대서사나 미시사나 기억은 어느곳에나 뿌리내린다.
1949년 4월 그 어느날까지 아우스터리츠란 이름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어요. 나는 그것의 철자가 어떻게 되는지조차 생각할 수 없었고, 79쪽
자신의 진짜 이름을 알게 되는 순간은 아우스터리츠의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상징하며, 정체성과 변화라는 주제를 보여준다. 이름에는 무게와 역사가 담겨 있으며, 이 순간은 주인공이 자신의 과거를 더욱 깊이 탐구하게 될 것을 예고한다.
그럼에도 독서와 글쓰기는 항상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137쪽
아우스터리츠의 독서와 글쓰기에 대한 애정은 문학이 자기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언어가 촉진제가 아닌 장벽이 될 때 그가 겪는 내면적 갈등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는 창작 활동이 어떻게 위안을 줄 수 있는지, 동시에 자신의 부족함에 직면했을 때 깊은 절망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을 불러일으킨다. 글쓰기에 빠져든 사람들, 장편이든, 단편이나 에세이이든, 글쓰기가 삶의 일부가 된 사람들에게 성찰의 시간을 갖게한다. 나 역시 '나에게 글쓰기란 무엇인가'를 한참 생각했다.
내가 연필을 붙들기만 하면 이전에는 편안하게 나를 맡길 수 있었던 언어의 무한한 가능성이 이제는 가장 매력 없는 문구의 잡동사니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지요. 그 어떤 표현도 처량한 절름발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공허하거나 거짓으로 들리지 않는 단어는 하나도 없었지요. 138쪽
푸가는 주제가 한번 제시되고 다른 성부가 조금 늦게 같은 주제를 이어받는다. 처음 주제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밑에서 흐른다. 제발트의 소설 구성도 그렇다. 기차역→건축→요새→사진→유년기→부모→홀로코스트→다시 건축→다시 기차역. 같은 이미지가 계속 다른 모습으로 돌아온다. 소설이라기보다 하나의 음악 구조다. 그의 기억은 단절된 과거가 아니라, 마치 바흐의 푸가처럼 끊임없이 뒤섞이고 반복된다. '푸가(Fuga)'가 '도주'를 뜻하듯, 아우스터리츠는 평생 과거로부터 도망쳤지만, 역설적으로 그 도망의 궤적(선율)들이 겹쳐지며 잃어버린 삶의 실체를 드러낸다.
마침표 없이 몇 페이지씩 이어지는 만연체는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음악적 선율과 같다. 이는 기억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마치 푸가의 선율처럼 앞선 기억이 뒤의 기억을 물고 늘어지며 끊임없이 순환하고 있음을 형태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음악적 구성은 독자가 단순히 정보를 읽는 것이 아니라, 아우스터리츠의 파편화된 기억을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장치다.
결국 이 소설은 한 개인의 기억을 넘어, 홀로코스트라는 거대한 역사의 슬픔을 대위법적으로 연주한다. 우리가 잊으려 해도 기억은 음악처럼 우리 곁을 맴돌고 있다.
푸가가 하나의 주제를 여러 성부에서 반복하고 변주하며 층을 쌓아 올리듯, 소설은 주인공 아우스터리츠가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반복적인 기억의 소환과 역사적 파편들의 중첩을 통해 보여준다.
소설 속 화자의 목소리와 아우스터리츠의 고백, 사진과 같은 시각적 자료들이 서로 얽히며 다성적인 구조를 형성한다. 이는 여러 독립된 선율이 조화를 이루는 푸가의 형식적 특징과 맞닿아 있다.
소설 곳곳에 삽입된 흑백 사진들, 기차역의 거대한 건축물, 나방과 같은 곤충의 이미지는 단순한 삽화가 아니다. 텍스트 사이사이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며 하나의 '시각적 테마'를 형성한다. 푸가에서 주제가 반복되듯 독자의 의식 속에서 반복된다. 반복과 변주의 라이트모티브(Leitmotif)와 닮았다.
이 소설은 화자가 아우스터리츠의 말을 전하고, 아우스터리츠가 다시 타인의 말을 인용하는 '액자 구조'다.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앞선 선율과 뒤따르는 선율이 서로 어우러져 거대한 대위법적(Counterpoint) 조화를 이루는 푸가를 연상케한다.
독일 문학에서 음악, 특히 대위법과 라이트모티프는 단순한 소재를 넘어 소설의 구조를 짜는 핵심 원리다. 토마스 만은 바그너의 음악적 기법을 소설에 도입한 선구자였고, W.G.제발트는 그 전통을 현대적(포스트모던) 방식으로 계승했다.
라이트모티프(Leitmotif)의 활용
<마의 산> - 한스 카스토르프가 산 위 요양소에서 만나는 특정 상징(예: 쇼샤 부인의 눈매, 죽음의 이미지 등)이 반복되며 인물의 심리와 주제를 심화시킨다. 이는 바그너식의 의도적 반복이다.
<아우스터리츠> - 제발트는 이를 사진, 건축적 디테일, 나방 같은 시각적 모티프로 치환한다. 만이 '단어'로 라이트모티프를 구축했다면, 제발트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교차를 통해 이를 수행한다.
대위법적 구조와 시간관
<마의 산> - 요양소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시간'에 대한 철학적 담론과 주인공의 일상이 대위법적으로 얽힌다. 만은 이를 통해 시대의 몰락을 장엄한 오케스트라처럼 구성했다.
<아우스터리츠> - 제발트는 개인의 미시적 기억과 홀로코스트라는 거대 역사를 대위법적으로 배치한다. 만의 대위법이 '조화와 통합'을 지향한다면, 제발트의 대위법은 사라진 것들에 대한 '애도와 추적'에 집중한다.
사상적 연결고리
제발트는 토마스 만을 깊이 연구한 작가였다. 만이 가졌던 '독일적 정신의 모순'과 '예술과 질병/죽음의 관계'라는 테마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두 작가 모두 음악적 구조를 빌려와 시간의 흐름과 기억의 본질을 탐구했다는 점에서 궤를 같이한다.
내가 만약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먼저 읽지 않은 상태에서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를 읽었다면 <아우스터리츠>를 읽는 동안 계속 음악적 선율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작가 빈프리트 게오르크 막시밀리안 제발트(Winfried Georg Sebald, 1944-2001)는 기억, 정체성, 상실의 광범위한 영향에 대한 심오한 탐구로 유명한 독일의 작가이자 학자였다. 그의 작품은 문명과 전통의 쇠퇴를 자주 다루었으며, 이러한 주제들을 제2차 세계 대전의 집단적 트라우마와 독일인의 정신에 남긴 잊히지 않는 유산과 복잡하게 엮어냈다. 제발트는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문학 평론가들로부터 당대 최고의 작가 중 한 명으로 칭송받았다. 많은 이들이 그가 장차 노벨 문학상을 수상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아우스터리츠>처럼 역사적 사실을 소설화한 바카라을 들자면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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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발행한 토마스 만 <마의 산> 리뷰에서 푸가의 대위법과 라이트모티프가 작품에 어떻게 적용됐는지 좀더 자세히 알 수 있다. 토마스 만이나 헤르만 헤세 시대의 독일문학은 마침표를 찾기 힘든 길고 긴 문장의 만연체였다. 또한 많은 음악들이 바카라 속에 들어있다. 특히 토마스 만 <마의 산>이 그러하다. 문학작품 한 권을 읽으면 철학바카라 몇 권을 함께 읽은 것같고, 여러 곡의 클라식 음악을 감상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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