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교회 평화부 박범희
이야기 바카라 <등대섬>은 오직 기독교인들에게 읽히기를 바라는 바카라은 아닙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함께 읽기를 바라는 소설입니다. 종교인들은 각자의 종교적 관점에서, 비종교인들은 문학이 말하고자하는 시대정신에 대해서, 잠시 쉬면서 "나의 소도는 어디일까, 누구일까? 나는 타인의 소도가 되어있는가...?" 이런 질문을 남기는 이야기입니다.
2026.05.31 oo교회 평화부 주최 <등대섬> 북토크의 발제문입니다.
기독교단체의 초청 북토크로 이 글은 기독교 신자가 쓴 발제문임을 알려드립니다.
이현우는 어린 시절 등대섬에서 자라, 서울로 가서 신학대학에 진학하여 목사가 된다. 이 시기에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면서, 대형 교회 목사 딸인 박은혜와 만난다. 박은혜와 헤어지고 등대섬 교회 목사가 되어 5년 간 목회를 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아버지의 배 갈매기호를 타고 사라진다.
한 달 후에 돌아와서는 목사를 그만두고, 등대섬 사람들과 함께 한 젊은이로 살아가겠다고 다짐을 한다. 목사로서 받은 급여를 마을 공동 기금으로 내놓았으나, 갑자기 사라진 사건을 큰섬 본교회에서 알게 되면서 급여가 끊어지면서 마을 어른들의 생활이 어려워지자, 미숙이 중심이 되어 해풍쑥 생산 및 판매사업으로 활로를 개척한다.
현우와 미숙은 마을 어르신들의 기억을 들으면서 어르신들의 죽음을 준비한다. 그러는 중에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마을 어르신들이 하나 둘 돌아가시면서 종국에는 현우와 미숙만 남게 된다. 두 사람이 큰섬으로 나오면서, 등대섬은 무인도로 된다. 그러나 현우가 마음을 고쳐먹고, 여전히 마을 어르신들의 기억이 남아 있는 등대섬으로 돌아간다.
이때 새롭게 임명된 등대 관리인 가족도 들어간다. 이후에 몇몇 사람들이 등대섬에 살기 위해 들어온다. 그 사람들 중 기독교인들이 있어서 교회를 다시 운영하자고 현우에게 이야기하지만, 현우는 거절한다. 그러자 배신자라며 심지어는 '적그리스도'라 비난한다. 그러나 현우는 그러한 사람들조차도 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소설 예수>는 어마어마한 분량에 압도당하고, 지금까지 성서를 이해하던 방식과 다른 눈으로 해석한 것에 놀라서 내용을 따라가기에 급급했다면, <등대섬>은 일단 분량이 소박했기에 조금은 쉽게 읽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용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읽어가면서 “그렇지!”를 연발하기보다는 “그럴까?”를 자주 터트리곤 했다.
소설바카라의 마지막 페이지는 원고지인데, 그 앞에 <소설 예수> 광고가 나온다. 거기에는 “나는 메시아가 아니오!”라는 센세이셔널한 주장이 나온다. 만약 <등대섬> 광고라면 아마 “나는 더 이상 목사가 아니오!”라는 문구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이 문구가 <등대섬>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소설의 시작이 주인공 이현우가 어느 날 갑자기 등대섬을 떠나버린 것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현우가 더 이상 목사가 아니라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할까? 이현우 개인으로서는 아주 중요한 문제일 수 있겠지만, 슬롯적 파급력은 전혀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목사도 하나의 직업으로 생각하고 있는 경향이 강하고, 특히, 요즘처럼 극우 기독교인들이 전체 기독교를 대표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지금부터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주제를 중심으로 바카라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거기에 내 생각을 덧붙이도록 하겠다.
작가는 ‘등대섬 사람들’과 ‘등대교회’를 분리해서 서술하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지난 삶이 모두 잘못이었다거나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하라고 윽박질렀다면 그 누구도 절대로 예수를 믿지 않았을 것이다. 교회를 처음 세울 때부터 등대섬 사람들에게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절차나 규정을 강요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들은 살아오던대로 살면서 교회라는 이웃 하나 새로 받아들인 것처럼 지냈다.”(36~37쪽)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등대교회 목사를 그만두면, 기독교에서 걸어 나오면, 나는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는 사람인가?’ 기독교에서는 그렇다고 말하겠지만, 그가 아는 등대섬은 그렇지 않은 곳이었다. 세상 끝이라지만 교회가 아니라도, 기독교라는 종교가 아니라도 어떻게 살아갈지 터득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159쪽)
작가는 등대섬 사람들을 등대교회보다 중심에 놓고 있다. 심지어 현우의 혼잣말을 통해 “하기야, 사람 사는 곳이 중심이지”라고 하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현우가 섬을 떠나 다시 돌아온 것은 ‘등대교회 목사’로부터 ‘등대섬의 젊은이’로 돌아오는 커다란 변화를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설을 읽어가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이해되지 않는다. 등대섬 사람들과 커다란 갈등이 있다든지, 아니면 본 교회인 큰섬교회와 갈등이 벌어져서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면 몰라도 그런 사건들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조그만 배 <갈매기호>를 타고 이현우가 사라진 것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현우가 등대섬에 와서 나름 목표를 세우기도 했던 적도 있었다.
“남해 바다 외딴 등대섬에 산다고 해서 귀양살이는 아니라고, 현우는 등대교회 목사로서 마을 어른들을 위로하고 싶었다. 등대섬은 버려진 섬이 아니고, 주민들도 세상에서 잊힌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함께 확인하며 살기로 마음먹었다. 초기 기독교 - 2 공동체처럼 서로 나누고 보듬는 마을을 이루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처음 생각으로는 등대섬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104쪽)
그러나 섬에 들어온 지 반년이 채 안 됐을 때부터 섬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의 가슴 속에 조용히 흐르는 두 줄기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등대교회 목사, 다른 한 줄기는 젊은 현우였다.” (118쪽)
“마을에서 교회로 물러난 이상, 현우는 등대섬을 떠난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등대섬 위에 잠시 머물다가 바람 따라 다시 둥둥 떠가는 구름이었다. ‘내 마음은 어디로 흘러 흘러 … 몸은 뒤에 남아 있는데’ 섬에 돌아온 지 반년쯤 지났을 때부터 그랬다. 불쑥불쑥 이곳을 떠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정말 떠날 수 있다면 눈 닿는 끝까지 온통 바다로 가득 찬 남쪽으로 가고 있었다. 한없이 흘러가다 보면 태평양에 이를 것 같았다. ~~ 끝에는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도시들과 서울이 있어서 싫었다.”(49쪽)
이렇게 보면 이현우가 섬을 떠나겠다는 생각은 상당히 감정적이고 충동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게 된 배경에는 나름 신학적인 배경이 있었던 것 같다. 젊은 현우에게 신학대학 시절 큰 영향을 주었던 ‘신학교 산신령’이라 불린 김교수의 다음 말은 이현우의 고민을 짐작하게 한다.
“기독교를 무엇이라고 부를까? 어느 섬에 세워진 등대를 상상해 봐. 캄캄한 밤, 파도를 헤쳐 나가는 배는 밤바다를 비추는 등댓불을 보며 항로를 가늠하지. 그런데 어떤 배도 등대를 항해의 목적지로 삼지는 않아. 등대는 내가 지금 어디에 있고, 목적지를 향해 제대로 가고 있는지를 확인해 주는 지표일 뿐이지. 기독교도, 이 시대의 교회도 그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기독교는 처음부터 의미 없는 종교인가? 예수는 기독교에만 의미 있는 인물인가?”(119쪽)
기독교는 등대처럼 목적지가 아니고 목적지를 향해 제대로 가고 있는지를 확인해 주는 지표일 뿐이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다음은 좀 더 구체적인 현우의 기독교관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가장 큰 기둥으로 삼는 기독교지만 현우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살아 있는 예수, 살아서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그들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받아들였던 예수’였다. 등대섬에서 만나는 예수는 그런 예수여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위로와 구원을 하느님의 은혜에서 찾자는 신앙과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자는 운동이 맞부딪치는 지점이었다. ~~ ‘기독교를 거슬러 올라가면 예수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에서 흘러내린 물이 꼭 기독교에 이르지는 않는다.”(121~122쪽)
살아 있는 예수를 꿈꾸는 현우. 그러나 현실에서 그것을 실현해내기는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은혜가 준 바카라 가운데에는 주류 기독교가 애써 외면하는 주제를 다룬 바카라들도 있었다.
“특히 20세기 최대의 발견이라는 ‘나그함마디 문서’를 해설한 바카라과 논문도 있었다. ‘예수를 따르는 수많은 운동 중의 하나’가 기독교라는 제도 종교로 발전했다는 것을 밝히는 내용이었다. 기독교가 교리를 세우는 과정에서 자기들이 고백하는 예수와 다른 예수를 모두 밀어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성경에 포함되지 못한 여러 문서 속에서 현우는 사람 냄새 나는 예수를 만났다.”(138쪽)
이런 생각을 가진 현우가 등대교회 목사로서 지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등대교회 목사로서 ‘사람 냄새 나는 예수’를 따르는 목회를 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돌아온 직후 이현우는 마을 어르신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 어른들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현우가, 오늘은 등대교회 목사가 아니라 등대섬 젊은이로 다시 돌아와 어른들게 인사드립니다. ~~ 지난 5년 동안 저는 몸만 돌아왔지 마음은 엉뚱한 곳을 떠돌았습니다. 어른들께서는 그동안 말없이 기다려 주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정말 함께 ... 잘 살겠습니다."(166쪽)
한편, 황씨 할머니와 마을 어르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늙은이들 허물이 크지. 젊디젊은 사람을 목사니까 다 견딜거라 믿고 놔뒀으니. 얼마나 힘들었으면 파도 높은 밤에 섬을 떠났을까. 섬에서 나고 자랐으니 배가 뒤집히면 죽는다는 걸 잘 알았을 텐데. 그런데도 밤바다로 나간 거, 죽음을 마주하려 했던 걸로 나는 생각하네."(168쪽)
"현우가 참 외로웠구나. 우리가 너무 몰랐지."(168쪽)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현우, 어느날 갑자기 돌아와서는 교회당에 엎어져 있던 현우. 그 옆에서 <홀로 아리랑>을 등대섬으로 개사해서 노래 부르는 황씨 할머니. 나는 이 부분을 참 어색하다고 느끼면서 읽었다. 작가는 왜 이런 장면을 넣었을까? 아마 마을 사람들이 이현우의 외로움에 공감하며 목사로서 등대섬에서 겉돌고 있던 이현우를 받아들이면서, 이현우가 진정 마을 사람들과 하나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닐까 한다.
“등대섬 사람들은 서로의 과거를 묻지 않는다. 언제, 왜, 어떻게 이 섬에 들어왔는지 아무도 캐묻지 않는다. 사람이 사는 곳의 끝자락을 찾아든 이들에게 단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아무도 과거의 삶을 끌고 오지 않는다는 것. 그들은 자기 몸 안에서 시간의 끝과 공간의 끝을 지켜보며 산다. 어쩌면 살아서 죽음 이후의 삶을 사는 일인지도 몰랐다. 이미 한 번 세상을 건너온 이들, 살아서 죽음을 통과한 사람들이었다.”(215쪽)
‘살아서 죽음을 통과한 사람들’의 사례로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시기 총상을 당해 불구가 되었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집 김씨’, 1948년 전후로 벌어진 제주 4.3사건에서 가족을 잃은 남집사, 6.25전쟁 시기 지리산 자락에서 남편과 시아버지를 잃은 황씨 할머니 등을 들 수 있다. 국가폭력의 희생자들로 등대섬에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서로의 과거를 묻지 않는다’는 말은 소위 ‘빨갱이’로 몰린 사람들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현우는 다음과 같이 반성한다.
“현우는 속으로 깊은 숨을 내쉬었다. 등대교회 목사로 지낼 때 마을 어른들의 아픔을 정말 함께 짊어졌던가. 한 사람의 몸속에 감춰진 아픔을 함께하려면 몸의 경계를 뚫고 들어가 살과 뼈로 엉겨 붙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피와 살로 맞닿지 않고서는 결코 타인의 고통에 닿을 수 없다. 그제야 자신이 왜 등대교회 목사로서 실패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됐다.”(216쪽)
이후 현우와 미숙은 마을 어른들의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을 지키면서 그들의 말을 듣게 되었다. 가슴 속의 이야기를 들으며 현우는 깨달았다.
“늘 얼굴을 마주하며 살던 어른들에게 그런 아픈 사연이 숨어 있었다는 일이 참 놀라웠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살아온 그들이 안쓰러우면서도 존경스러웠다.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온 어른의 삶에 깊게 들어가 본 적 없다는 것이 현우는 부끄러웠다.”(243쪽)
하지만 누군가의 삶에 깊게 들어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아니, 가능한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과연 타인의 고통에 가 닿을 수 있는 것일까? 등대섬 어른들의 삶을 너무 미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름 최선을 다한 현우가 그렇게 부끄러워해야만 하는 것인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죽을 힘을 다해 한 걸음씩 움직여 등대섬에 닿은 어른들은 자기가 누구이고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대신 문을 열고 담을 허물어 서로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꿈이나 소망이 아니라, 납작해진 삶 자체에 대한 서로의 연민으로 이어져 있었다. 서로에게 선물이 되려 애썼고, 끝없이 서로에게 빚진 사람처럼 살았다. 그것은 삶의 어떤 방식이 아니라 삶 자체였다.”(268쪽)
연민으로 이어져 있고, 선물이 되려 했으며, 서로에게 빚진 사람처럼 살았다는 이야기는 선언적으로 들린다. 이러한 선언이 구체적인 삶의 모습으로 소설에서 형상화되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등대섬>에서 교회에 대한 내용은 상당히 비판적으로 나온다.
대표적인 것이 ‘그집 김씨’가 광주에서 공수부대의 폭력을 피해 교회로 도망쳐 들어가는 순간 교회 문이 잠기고, 남겨진 그는 결국 총상을 입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받아들일 사람, ‘우리’에 속한 사람만 들이고 문을 닫는 기독교를 상징하는 말처럼 들렸다. 세상이 모두 물에 잠길 것을 뻔히 알면서도 비가 쏟아지자 방주 문을 닫았다는 노아의 이야기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구원받을 사람과 남겨질 사람을 구분하는 일의 시작이었다.”(68쪽)
노아의 방주 사건을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한편 다시 돌아온 등대섬에서 등대관리원은 등대섬 교회를 다시 여는데 뜻을 함께 하지 않은 이현우에게 다음과 같이 독한 말을 퍼붓는다.
“우리는 등대섬이 왜 무너졌는지 이제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그건 아저씨가 전능하시고 자애로우신 하나님을 떠나 배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는 아저씨가 배교자를 넘어, 어쩌면 적그리스도일지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자기 손으로 교회 문을 닫은 사람을 달리 무어라 부르겠어요.”(299쪽)
“현우는 이미 오래전부터 깨닫고 있었다. 기독교라는 종교는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다가 떠난 사람들을 배반자라 부르고 가차 없이 내친다는 것을. 자기들 공동체의 공동고백과 조금만 달라도 ‘같은 하늘 아래 절대로 살아갈 수 없는 적’으로 삼는다. 뉘우치고 돌아오라는 말은 기독교라는 큰 틀로 들어오라는 열린 초대가 아니었다. 자기들이 설정한 방식으로 자기들이 고백하는 공동체로 돌아오라는 말, 어찌 보면 조건 없이 항복하라는 요구였다.”(300쪽)
보통 독한 말을 마음 속에 지니고 있지, 면전에서 쏟아붓지는 않는데, 작가는 기독교인의 무례한 행태를 이렇게 비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를 극단적인 종교로 비판한다. 기독교가 그런 측면이 없지 않지만, 오히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떠올랐던 것은 조선 후기 성리학자들이나 분단 이후 공산주의자들의 교조적인 모습이었다. 그리고 신채호의 어떤 사상이 조선에 들어오면 조선의 사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상의 조선이 된다고 하는 말도 생각났다. 기독교도 한국의 기독교가 아니라 기독교의 한국이 되어버린 것을 비판한 것이리라.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한 젊은이와 대화에서 현우는 등대섬을 옛날로 치면 ‘소도(蘇塗)’ 같은 곳이라고 했다. 소도란 삼한시대 천신에게 제사를 지낸 성지(聖地)를 가리키는 말로 도둑이 들어가도 권력자들이 잡으러 들어가지 못했다는 곳이다.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 위서>에 나오는데, 중국 역사서에서는 주변 민족을 얕잡아 보는 경향이 강해서, 소도 때문에 삼한에는 도둑이 많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도둑이란 슬롯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자로 볼 수 있고, 따라서 역사학계에서는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넘어가면서, 변화하는 슬롯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곳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러한 해석을 연장하여 현대 한국사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독재 권력에 저항하다가 피해서 들어간 ‘명동성당’이나 ‘조계사’ 같은 곳들을 현대판 소도라고도 한다.
등대섬을 소도라고 한 것은 해방 직후의 친일파 청산의 실패와 좌우 이념투쟁의 격화, 제주 4.3사건, 1980년 광주민주화 운동 등의 아픈 역사의 희생자들이 살기 위해 들어온 곳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소도의 의미를 아는 젊은이가 옆에 있다는 것에 위안을 얻는다. 그때 머리 위를 찬찬히 훑어 지나가는 등대 불빛은 경계를 가르는 감시의 빛이 아니며 등대는 외로운 사람을 품어 감춰주는 곳이라 하였다. 어쩌면 교회는 가르고 배제하고 욕하는 곳이 아니라 아프고 외로운 사람들을 품어주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질문1. 등대섬 사람들과 등대교회가 분리되어 서술하고 있는데, 이 둘이 하나가 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제가 <등대섬>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하나가 될 수 없을 정도로 한국 교회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만. 작가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질문2. 국가폭력 희생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사례로 언급될 뿐이다.
그러나 국가폭력 희생자들이 소위 ‘빨갱이’라는 손가락질에서 벗어나기까지 무수한 고난과 이에 대항하는 노력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국가폭력 희생자들에게 혐오 표현으로 공격하고 있는 세력들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작금의 ‘탱크데이 사건’이 그것이라 생각한다. 국가폭력 희생자들이 숨어든 ‘등대섬’ 이야기가 아니라, 이들의 싸움을 통해 국가폭력 희생자들이 정상적으로 복권되는 과정이 소설에 나왔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에 대한 생각은 어떠신지요?
위의 북토크 발제문은 기독교의 초청을 받아서 했던 북토크였고, 모든 북토크는 종교와 관계없이 진행됩니다.
원하시는 팀은 신청해주세요(온라인카지노 제안하기 메일로). 지역은 어디든지 가능합니다. 일정은 상의하여 정합니다. 참석인원이 5명 이상이면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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