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토크 <등대섬> 발제문 1

ㅇㅇ교회 문화부 박기원

bymorgen

이야기 바카라 <등대섬>은 오직 기독교인들에게 읽히기를 바라는 바카라은 아닙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함께 읽기를 바라는 소설입니다. 종교인들은 각자의 종교적 관점에서, 비종교인들은 문학이 말하고자하는 시대정신에 대해서, 잠시 쉬면서 "나의 소도는 어디일까, 누구일까? 나는 타인의 소도가 되어있는가...?" 이런 질문을 남기는 이야기입니다.


2026.05.31 oo교회 평화부 주최 <등대섬> 북토크의 발제문입니다.

기독교단체의 초청 북토크로 이 글은 기독교 신자가 쓴 발제문임을 알려드립니다.


소설 『등대섬』 서평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 없이 - 박기원


등대섬에서는 하느님이 하실 일이 없다

주인공 이현우는 어릴 적 아버지 이민수 장로에게서 “우리 등대섬에서는 굳이 하느님이 직접 나서서 하실 일은 없어.”(p.93)라는 말을 듣는다. 이 말은 “등대섬에서는 교회가 할 일이 없다”는 말로 소설에서 여러 번 변주(變奏)되어 나온다. 수수께끼 같은 말이다. 전지전능한 하느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하느님이 하실 일이 없다”는 말은 얼핏 모순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이민수 장로는 왜 등대섬에 교회를 세웠을까? 하느님이 하실 일이 없다면 기독교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이 물음은 이현우에게 풀어야 할 숙제가 되고, 동시에 이 소설을 이끌어 가는 핵심 주제가 된다. 서울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도, 도시 교회에서 목회할 때도 현우는 그 의문을 마음속에 간직한다. 그에 대한 답은 그가 등대섬을 도망치듯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고, 섬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상과 좌절, 그리고 도피

이 소설은 고향 등대섬의 목사인 이현우가 아무 말 없이 갑자기 섬에서 사라진 사건에서 시작한다. 현우는 어느 파도치는 밤에 등대섬에서 도망쳐 배를 타고 망망한 남쪽 바다로 향한다. 왜 그랬을까? 5년 전, 고향 등대섬 교회에 부임한 현우는 의욕적으로 신학교에서 배운 가르침을 전한다. 그는 여자친구 은혜의 아버지인 대형교회 목사가 하듯이 교회의 성장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기독교 초기 공동체를 모범으로 삼아 섬마을 목회를 해나가려 한다. 현우는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셨던 ‘고르반 제도’의 악용을 주제로 첫 설교를 한다. 그는 종교적 형식이나 제도보다 이웃과 가족을 향한 사랑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섬 주민들에게 말한다. 또한 큰섬 교회에서 받는 자신의 급여를 기꺼이 마을 주민들의 생계를 위해 내놓는다. 예수께서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식사하신 것을 본받아, 섬마을 사람들이 모여 밥을 나누어 먹는 일도 중요하게 여긴다.

현우는 남 집사에게서 기독교의 핵심인 십자가와 부활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힐난을 듣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는 교리의 선포보다 공동체의 삶을 더 중시한다. 큰섬 교회의 후원으로 설치한 펌프를 두고도 현우는 마을 사람들의 요구를 따른다. 주민들은 펌프보다 다시 샘을 복구하기를 원했고, 현우는 그 뜻을 받아들인다. 이처럼 현우는 교회의 제도적 권위보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하지만 이렇게 5년 동안 나름대로 노력했음에도, 현우는 늘 “등대교회와 마을 사이에 미묘한 틈”을 느낀다. 우선 주민들은 그의 설교에서 별다른 감동을 받지 않는다. 현우는 공동 식사를 기회로 삼아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친숙한 말로 풀어놓으려 하지만, 마을 어른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예수, 교회, 기독교 이야기만 나오면 사람들은 슬그머니 입을 다문다. 그것은 자신 들이 개입할 일이 아니라고 믿는 기색이다.

현우 역시 마을 사람들과 완전히 동화되지 못한다. 불쑥불쑥 새로운 곳으로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는 마을에 묵지 않고,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교회 옆 살림방에 머문다. 또한 마을 사람들의 일에도 깊이 관여하지 않는다. 그러다 동혁의 아버지 김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벌어지자, 현우는 자신이 목사로서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는 심한 자바카라감에 빠진다. 이어 미숙이 임신했다는 소문이 돈다. 결혼하지도 않았는데 아버지가 된다는 건 도덕적으로나 현실 적으로 그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알게 된 현우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야반도주를 감행한다.


귀환과 전환: 상처 입은 공동체 속으로

어느 일요일 아침, 한 달 동안 사라졌던 목사 현우가 교회당에 엎어져 있다. 이 장면은 도피, 바다, 죽음의 문턱, 귀환이라는 점에서 요나의 서사를 떠올리게 한다. 요나는 하느님의 명령을 피해 달아나다가 풍랑을 만나고, 바다에 던져지고, 큰 물고기 배 속에 갇힌다. 그는 “스올의 뱃속”, 곧 거의 죽음의 문턱까지 내려간다. 그리고 절박한 상황 속에서 요나는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삶의 방향을 바꾸어 니느웨로 향한다.

바다로 도망친 현우 역시 죽음의 고비를 넘긴다. 소설은 이 부분을 간략하게 묘사한다. “깨어 보니 하얗게 칠한 허름한 방에 누워 있던 일,” “배를 덮치는 파도”, “죽었나 살았나 꾹꾹 눌러보던 사람들”, “누군가 입안에 음식을 넣어주던 일”을 그는 기억할 뿐이다. 그는 정신을 잃었고,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 회생한 것이다. 하지만 정신이 가물거리는 상태에서도 현우는 “목사를 그만두면, 기독교에서 걸어 나오면, 나는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는 것인가?”(p.159)라고 끊임없이 자문한다. 그는 자신이 교회를 떠난다해도 “함께 살아갈지 터득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를 떠올린다. 그곳은 “윗사람 아랫사람, 지시하는 사람과 따르는 사람,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이 구분이 없는 세상, 이뤄 본 적 없지만 이루려고 끝없이 노력하는 세상”(p.160)이었다. 현우는 찾으려했던 그 공동체가 바로 “등대섬 어른들이 애써 이루어 놓은 세상”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는 등대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겠다고 결심한다.

바다에서 돌아온 현우는 예배당의 십자가를 내리고, 머리를 교회당 문 쪽으로 향해 엎드린다. 그의 방향 전환은 교회 안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교회 밖 세상을 향한 이동이다. 교회와 교회 아닌 것의 경계를 허무는 일이다. 현우는 목사직을 내려놓고 마을의 일꾼으로 상처받은 사람 들 속으로 들어간다.


상처 입은 치유자

등대섬 주민들은 저마다 내면의 상처, 곧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매일 긴 밤 내내 가위 눌리며” 상처를 견뎌내는 사람들이며, 미숙의 아들 다니엘의 표현대로 세상이 뱉어 낸 사람들이다. 등대섬 사람들의 트라우마는 슬롯적, 정치적, 시대적 폭력에서 비롯된 것도 있고 가족의 불행한 사건에 기인한 것도 있다. 등대마을의 지도자 격인 황씨 할머니는 빨갱이로 몰려 지리산 국군 토벌대에 의해 집안이 파괴된 희생자이다. 동혁의 아버지 김씨는 광주민주화 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쪽 다리를 잃었다. 남집사는 제주 4·3에서 부모와 형제가 희생되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미숙은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녀는 원치 않은 임신으로 다니엘을 낳고 고향인 등대섬으로 돌아온 사람이다. 이현우 역시 어머니의 얼굴도 모르고 성장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언제나 한결같이 의지할 수 있는 분이 아니었다. “하느님에게 부탁하는 믿음이 얼마나 허망하게 배반당하는지 등대섬에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p.38) 그래서 기독교가 어떤 가르침을 펼쳐도 그들은 애써 귀기울이려 하지 않았고, 교회가 그들의 삶의 기준이 될 수도 없었다. 교회는 섬의 주체가 아니라 미숙의 가게처럼 마을 공동체의 일부에 불과했다. 하지만 등대섬은 단지 상처입은 사람들의 섬이 아니라, 상처입은 사람들이 서로의 상처를 드러내지 않고 견디면서도 서로를 보살피는 돌봄의 공동체이다.

현우는 고향 등대섬에 살았던 주민들을 이렇게 회상한다. “어른들은 이 섬에서 서로를 살려냈다. 죽어도 마땅한 사람이란 세상에 하나도 없다는 믿음으로, 서로에게 생명이 되어 등대마을을 이루었다. ... 그들은 자기 몸의 상처에는 빨간약 한 번 바른 채 버티면서도, 다른 사람 상처에는 끝까지 눈을 떼지 않고 처치해주며 살았다.”(pp. 295~296) 이 말은 헨리 나우웬의 “상처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를 떠올리게 한다. 나우웬은 사역자나 치유자가 완벽하고 강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보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근본적으로 상처입은 존재이며, 그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진정한 돌봄이 시작된다고 본다. 나우웬에게 예수는 그 대표적인 모범이다. 예수는 상처받지 않는 초월적 존재로 멀리 서있는 분이 아니라, 고난과 상처를 몸소 겪음으로써 인간의 아픔 안으로 들어온 분이다. 그러므로 치유는 상처 없는 사람이 상처입은 사람을 고쳐 주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상처입은 사람들이 서로의 아픔 곁에 머무는 가운데, 그들 사이에 하느님이 함께하시는 방식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상처입은 치유자의 자리에 가까이 서있는 인물은 현우보다는 미숙과 황씨 할머니이다. 미숙은 자기 상처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녀는 악어에 물리는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도 작은 가게를 운영하며 어린 생명과 동네 사람들을 보살핀다. 섬마을이 경제적 위기에 몰렸을 때는 해풍쑥 재배를 제안하여 주민들의 생계 문제를 함께 해결해 나간다. 주민들이 모두 떠난 뒤에는 딸 은지를 위해, 자신을 “뱉어 낸” 육지를 향해 나아간다. 미숙은 상처받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다른 상처입은 사람들을 살려내는 인물이다.

반면 현우는 우유부단하고 소극적이며 관념적인 인물이다. 그는 신학적 이상을 말하지만, 정작 상처입은 사람들 곁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한다. 그는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는”(김소월, 산유화) 연약한 꽃과 같다. 마을과 교회 사이의 틈을 느끼면서도 그 틈을 온전히 넘어서지 못하고, 미숙의 임신 소문 앞에서는 바카라임을 감당하지 못한 채 도망친다. 그런 점에서 현우는 처음부터 상처입은 치유자였던 것이 아니라, 등대섬으로 돌아온 뒤에야 그 길을 배워가는 사람이다. 목사직을 내려놓고 현우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큰섬에 나가 공무원을 만나고, 마을의 재원을 의논하기 위해 대구에 사는 동혁을 찾아가기도 한다. 팬데믹으로 마을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간호사 출신인 미숙을 도와 마을의 허드렛일을 맡는다. 그는 목사라는 직함이 필요할 때는 굳이 자신의 신분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교리와 교의, 직함에 매이지 않는다. 성서의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도 그에게는 더 이상 추상적인 교리가 아니라 함께하는 삶의 방식이 된다. 그런 행함을 통해 스스로 변해가는 자신을 느낀다. 그런 점에서 현우도 상처입은 치유자이다.


경계를 넘어

이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은 여러 방식으로 경계를 허문다. 이민수 장로가 교회 남쪽 비탈에 아들이 바닷가로 내려갈 수 있도록 길을 낸 것도 그중 하나이다. 그것은 아이가 바다에 나가 놀 수 있도록 만든 길만은 아니었다. 상징적으로 보면, 그 길은 현우가 섬이라는 닫힌 공간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게 해준 통로였다. 훗날 현우는 그 길을 내려가 섬을 떠났고, 다시 그 길을 통해 등대섬으로 돌아온다. 길은 떠남과 돌아옴을 모두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경계를 막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통과하게 하는 장치이다.

현우가 펌프를 뽑아내고 마을의 샘을 복원하는 일도 경계를 허무는 행위로 볼 수 있다. 펌프 는 물을 편리하게 끌어올리는 장치지만 시멘트로 막혀 있다. 반면 샘은 물이 솟아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이다. 샘물은 늘 새롭게 솟아나고, 그 물을 뜨기 위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샘가로 모여든다. 현우가 원했던 공동체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필요한 것을 얻는 장소를 넘어,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고 말을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자리 말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사람을 갈라 세우는 경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아가게 하는 생명의 역동적 흐름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제도와 교리 안에 고정될 때, 그 흐름은 느려지고 굳어진다. 고인 물은 저장되고 관리될 수는 있지만, 새롭게 솟아나고 흘러가는 힘을 잃는다. 그 순간 교회 안과 밖, 신자와 비신자, 정통과 비정통의 경계가 생겨난다.

현우는 교회가 사람들의 삶을 향해 열려 있기보다 교회와 비교회를 나누고, 교의와 교리를 앞세워 예수의 가르침을 고정된 틀안에 가둘 때, 그것이 마치 흐르는 샘물을 저수지로 바꾸는 일과 같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가 샘을 복원한 일은 단순한 시설의 복구가 아니다. 그것은 교회가 사람들의 삶을 구분하는 자리에서 물러나, 다시 사람들이 서로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공동체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상징적 행위이다.


묻지 않는 환대, 하느님 없이 사는 바카라임

전에 살던 주민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현우도 섬을 떠나려고 미숙과 은지를 따라 큰섬으로 간다. 하지만 그는 마음을 바꾸어 다시 등대섬으로 돌아온다. 그가 돌아오던 날, 등대관리원 가족도 함께 마을로 들어온다. 이듬해 봄에는 주민이 열 명으로 늘어난다. 어느 날 현우는 새로 등대마을에 들어온 사람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놓고, 섬에서 살아가는 일종의 규칙을 말한다.

“여기서는 내가 무엇을 하던 사람이고, 왜 이 섬까지 들어왔는지 말할 필요가 없어요. 묻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고, 그게 이 섬에 살던 사람들이 애써 지킨 일이었어요.”(p.293)

타인의 과거를 묻지 않는 현우의 규칙은 자크 데리다가 말한 무조건적 환대를 떠올리게 한다. 데리다에게 참된 환대는 타자를 먼저 확인하고 분류한 뒤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다. 무조건적인 환대는 그가 누구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왔는지를 묻고 싶은 호기심을 억제하는 데서 시작된다. 상대의 신원과 고향을 묻는 말은 겉으로는 관심처럼 보일 수 있지만, 상처를 지닌 사람에게는 자신을 설명하고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등대섬의 ‘묻지 않음’은 무관심이나 방치가 아니다. 그것은 상처 입은 사람이 자기 과거를 해명하지 않아도 머물 수 있게 해주는 침묵의 환대이며, 말하지 않을 권리까지 받아들이는 배려이다. 그것은 사람에 대해 경계를 세우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새로 들어온 등대섬 주민들이 교회를 다시 세우겠다고 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그들은 현우에게 목사로서 예배를 인도하고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부탁한다. 이때 등대섬에는 다시 하나의 경계가 생긴다. 목사와 주민, 교회와 마을, 신자와 비신자의 구분이 다시 고개를 드는 것이다. 현우에게 그것은 바깥세상의 질서가 등대섬 안으로 다시 들어오는 일처럼 보인다. 새 주민들은 등대섬 교회를 등대마을의 중심으로 세우려 하고, 현우를 다시 목사의 자리로 불러 세우려 한다. 그러나 현우에게 교회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교회는 사람들이 서로의 이웃이 되는 삶을 가리키는 지표일 뿐이었다. 신학교 시절 김교수의 말도 바로 그 점을 일깨워 준다.

“기독교를 무엇이라고 부를까? 어느 섬에 세워진 등대를 상상해 봐. 캄캄한 밤, 파도를 헤쳐 나가는 배는 밤바다를 비추는 등댓불을 보며 항로를 가늠하지. 그런데 어떤 배도 등대를 항해의 목적지로 삼지는 않아. 등대는 내가 지금 어디에 있고, 목적지를 향해 제대로 가고 있는지를 확인해 주는 지표일 뿐이지. 기독교도, 이 시대의 교회도 그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미 등대섬의 삶을 체험한 현우는 새 주민들이 교회를 다시 세우는 일에 참여하기를 거절한다. 그러자 그는 적그리스도니, 배교자니 하는 말을 듣게 된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기독교와 비기독교, 교회 안과 교회 밖을 가르는 사람들을 대하면서 현우는 어릴 적 아버지가 했던 수수께끼 같은 말을 떠올린다.

“왜 하느님이 등대섬에서는 하실 일이 없는지 아버지가 했던 말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섬사 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존재를 섬기는 일이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과 함께 살고 서로에게 빛이 되어 주는 일이었다.”(p.303)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던 현우의 물음이 해소되는 순간이다. “등대섬에서는 하느님이 하실 일 이 없다”는 말은 하느님이 부재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처 입은 사람 앞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바카라임을 하느님께 미루지 말라는 뜻이었다. 하느님이 하실 일을 기다리는 대신, 지금 곁에 있는 상처받은 타인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이었다.

예수가 비유로 가르친 선한 사마리아인은 바로 그렇게 살았다. 그에게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도, 거룩함과 더러움의 구분도 없었다. 그는 다만 길 위에 쓰러진 상처입은 사람을 보았고, 그의 이웃이 되었다. 그러므로 등대섬에서 하느님이 하실 일이 없다는 말은 하느님의 일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일이 인간의 바카라임으로 넘어왔다는 뜻이다. 등대섬에서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는 일이 아니라, 상처 입은 사람들이 서로의 이웃이 되는 일이었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표현을 빌리면, 이 말은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과 함께, 우리는 하느님 없이 산다(Vor und mit Gott leben wir ohne Gott.)”는 말과 맞닿아 있다. 본회퍼의 역설에서 “하느님 없이” 산다는 말은 하느님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바카라임을 하느님께 떠넘기지 않고, 마치 하느님이 개입하지 않는 것처럼 세상의 고통에 응답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등대섬에서는 하느님이 하실 일이 없다”는 이민수 장로의 말은 본회퍼의 역설과 깊이 맞닿아 있다.


바람으로 울리는 종소리, 하느님의 현존

새로 들어온 주민들에게 교회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한 그날 저녁, 현우는 교회 마당에 있다가 문득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리고 벽에 묶여 있던 종줄을 풀어 놓는다. 바람이 불자 댕그렁 종소리가 들린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고, 제멋대로 울리는 소리. 바람이 흐르는 대로 스스로 울리는 소리. 집집마다 기웃거리며 마당에 서서 숨결을 헤아리는 분의 마음이 된다.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 제멋대로 울리는 종소리는 귀 열린 사람만 듣는 그분의 음성일 것이다.”(p.305)

이 장면은 예수가 니고데모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 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요한복음 3:8) 성령은 사람이 붙잡거나 지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람처럼 자유롭게 불고, 사람은 다만 그 소리를 들을 뿐이다.

허공에는 경계가 없다. 그래서 바람의 세기에 따라 종은 크게도 작게도 울린다. 바람은 제 마음대로 불고, 공중에 매달린 종은 마치 “온몸이 입이 되어 허공에 걸린 듯이(通身是口掛虛 空)” 바람이 불어오는 대로 소리를 낸다. 동풍이 불든 서풍이 불든 거기에 맞추어 울리는 것과 같다. 현우는 울리는 종소리에서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 그것은 사람이 손으로 쳐서 만들어 낸 종소리가 아니라, 바람이 지나가며 스스로 울리는 소리이다.

현우가 종줄을 풀어 놓는 행위는 상징적이다. 그것은 하느님을 떠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현존을 더 넓은 자리에서 듣게 되는 일이다. 그것은 교회의 울타리와 교리의 언어를 넘어, 상처 입은 사람들 사이에 이미 머물고 있는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소리이다. 현우는 스스로 ‘도인’이 된 것은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경계를 넘은 사람이 된다. 바람이 불고 싶은 대로 불듯이, 그는 이제 교회와 비교회, 신자와 비신자, 거룩함과 더러움의 경계에 매이지 않는다. 그 모든 대립조차 모두 하느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마지막은 섬에 새로 들어온 한 젊은이가 그런 현우의 마음을 어렴풋이 이해하고, 그의 새로운 이웃이 될 것을 암시하며 끝난다. 현우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논어』의 말처럼, “덕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게 마련이다.”(德不孤 必有隣)


끝


참조: 인용 시

風鈴 (풍령)

通身是口掛虛空 (통신시구괘허공)

不管東西南北風 (불관동서남북풍)

一等與渠談般若 (일등여거담반야)

滴丁東了滴丁東 (적정동료적정동)

天童如淨(천동여정-송나라의 승려)


풍경

온몸이 입이 되어 허공에 걸려

동서남북 어느 바람도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그에게 반야 지혜를 들려주네

뎅그렁 뎅, 뎅그렁 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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