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달 가야금

민요를 가을 논에서—

열두 줄의 가야금、‘열두달’의 시간....


지난 겨울, 가야금을 배웠습니다.

장구, 아쟁, 해금, 거문고. 마음에 품어온 우리 악기는 많았지만, 그 첫걸음으로 가야금을 골랐습니다. 오동나무 몸통 위, 안족 위에 가지런히 놓인 열두 줄. 가야금을 만드는 장인도 이제 몇 분 남지 않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처음 제 곁에 온 가야금이 그저 기쁘고, 또 귀하게 느껴졌습니다.


오동나무 뒤판에는 해와 달이 나란히 새겨져 있습니다. 가야금을 들고 길을 나설 때면 그 자리에 손을 넣어 품에 안습니다. 악기를 든다기보다, 가야금과 제가 한몸이 되어 함께 걷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열두 줄 위로 흐르는 농현은 한 해를 이루는 열두 달의 시간을 닮았습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옛 기록에도 가야금의 줄과 기둥은 열두 달을 본뜬 것이라 전해진다고 합니다. 이 악기에는 처음부터 계절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지요.


무대 위 연주가들을 바라보기만 할 때는 미처 보이지 않던 것들이 있었습니다. 직접 줄을 짚어보고 나서야 그것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줄을 튕기는 오른손의 주법, 소리를 흔들고 꺾어 숨을 불어넣는 왼손의 농현. 음 하나에도 이토록 많은 손길이 담겨 있다는 것을,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 겨울, 가야금 병창님을 통해 민요도 함께 배웠습니다. 방아타령, 풍년가.


곡식을 찧으며, 풍년을 바라며 부르던 노래들입니다. 방 안에서 한 소절씩 따라 부르다 보면 문득 이런 물음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이 노래들이 본래 울려 퍼지던 곳은 어디였을까. 들녘에서, 논두렁에서, 땀 흘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불리던 노래를, 우리는 어느새 무대와 방 안에서만 듣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번 가을, 그 노래들을 본래의 자리로 모셔가 보기로 했습니다.

서울 종로의 한옥을 거점으로 계절마다 한국의 정(情)과 흥(興)을 나누어 온 열두달에피소드(@ep12_hanok)와 함께, 파주의 논에서 추수의 하루를 엽니다.

첫 이야기는 절기 '상강'으로 시작합니다.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이 무렵, 옛사람들은 들녘에서 무엇을 거두었고, 어떤 마음으로 겨울을 맞이했을까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나면, 눈앞의 황금빛 논이 조금은 다르게 보이실 겁니다.


그리고 벼를 베던 그 시절처럼, 노동요를 함께 부릅니다. 가야금 병창 임은비의 소리와 타악의 장단에 맞춰 한 소절씩 따라 부르다 보면, 어느새 손이 박자를 타고 일은 놀이가 됩니다. 노래 한 가락에 힘을 모으던 옛 들녘의 흥이란, 아마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사실 노래를 들려주실 우리 병창님께서도 아직 실제 논에서 소리를 해보신 적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무대 위에서는 수없이 불러오신 노래이지만, 황금빛 논 한가운데서 부르는 풍년가는 분명 다르게 울릴 것이라고, 그러니 꼭 한번 함께 경험해 보자고 미리 말씀을 나누어 두었습니다.


지난 겨울 방 안에서 익힌 열두 줄의 소리와 민요 한 가락이, 이번 시월에는 들녘의 바람을 만납니다.

노래가 있어 더 즐거운 수확의 하루. 그 자리에 함께해 주신다면 더없이 기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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