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 뒤, 인왕산 수성동 계곡에 가보신 적 있나요?

서촌에 살고 있는 문화예술기획자의 면접 에피소드

by열두달에피소드

비 온 뒤, 인왕산 수성동 계곡에 가보신 적 있나요?

어제 마지막 서울시 대면심사에서 받은 질문 중

" 왜 하필 ‘인왕산 풍류’ 공연 장소로 인왕산 수성동 계곡을 선택하셨나요?"


떨리는 마음으로 두서없이 대답을 했지만

대면심사를 모두 마치고 돌아서서 나온 후

눈앞에 펼쳐진 서울을 바라보며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예로부터 물소리가 맑아 ‘수성’이라고 불린 풍류를 즐기는 사람들이 모이던 곳. 세종의 셋째 아들, 뛰어난 예술가였던 안평대군의 비해당이 있었던 아름다운 곳. 1971년 옥인시범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사라졌다가 41년 만인 2012년 아파트가 철거되고 다시 옛 모습으로 복원된 ‘도시 재생’의 현장이기도 하지요. 겸재 그림 속 기린교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잊히고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마음. 우리 문화를 다시 기억하고 이어가면 좋을 것 같아 24 절기에 맞춰 매 달 갖던 자리가 어쩌다 보니 3년 넘게 지속되고 인왕산 풍류도 올해 4번째입니다. (2026년 10월 17일 오후 4시) 올해는 서울문화재단 ‘서울 어텀 페스타’에 선정되어 더욱 의미가 크네요.


무엇보다도 전 밤 낮으로 인왕산에 자주 산바카라가는 ‘인왕산 러버’입니다. 비가 오면 꼭 수성동계곡으로 산바카라을 가서 물소리를 듣곤 하지요. 물소리와 대금과 거문고 소리,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 계곡 물에 발 담그고 앉아 바카라을 보고 있으면 말이 필요 없는 풍류 그 자체. 어느 날엔가 수성동계곡을 산바카라하고 있는데 택시를 타고 도착하신 어느 할머니와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릴 적 살던 곳인데 비가 오면 늘 이곳에 오고 싶어 하신다고... 여기서 수영도 하며 놀았던 어릴 적 기억이 소중해서 비 오는 날 택시를 타고 오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사진을 남기고 싶어 하셔서 두 분의 다정한 모습을 담아드린 기억이 나네요. 비가 온 뒤 인왕산 수성동 계곡의 그 풍경과 공기의 냄새, 습도..


겸재의 인왕제색도 그림 속 먹 빛 바위, 안개, 물소리... 바라볼 때마다 다른 빛의 산.. 인왕산이 저에게 주는 감각은 정말 남다른 것입니다. 제 마음속에는 늘 인왕산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마음에 산을 품고 살아가면 늘 산과 함께 하고 있는 느낌. 한옥을 짓던 고된 시간 속 인왕산에서 위로받은 그 시간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산이 저에게 베풀었듯이 저도 다른 분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


인왕산 풍류를 수성동계곡에서 시작하게 되었던 것은 라파엘의 집 휠체어 소녀 유민이 덕분이었습니다. 물소리를 좋아하는 유민이는 바나나우유를 빨대로 마실 근육의 힘도 없고 온몸이 떨리는 불치병을 가지고 있지요.

물소리를 좋아해서 활동보조 선생님께서 수성동계곡 앞으로 산바카라을 데리고 왔어요. 물소리를 들으며 좋아서 해맑게 웃던 유민이의 얼굴이 생각나네요.


한옥에서 기획하는 좋은 소리를 라파엘의 집 아이들에게도 들려주고 싶었지만 오기 쉽지 않은 곳이어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아이들이 이미 수시로 산바카라 오는 인왕산 수성동 계곡이라면 가능하겠구나 싶어 종로구 공원녹지과에 기획서를 전달하고 의논하며 허가를 받고 진행하게 되었어요.


저는 심각한 ‘인왕산 러버입니다. 서촌으로 처음 이사 왔을 때 앞 집 정정해 할머니와 함께 산에 오르게 되었어요. 함께 한옥을 짓게 된 정해 할머니와 저는 의논할 것이 정말 많았거든요. 핸드폰을 잘 사용하시지 않는 할머니는 산에서 이야기 나누자고 하셨답니다. 정말 정정하신 할머니와 새벽 4시 사직 주민센터 앞에서 만나 함께 아직 깜깜한 산으로 들어갑니다. 밤새 거미가 친 거미줄을 헤치며 앞서 가는 할머니는 한 번도 같은 길로 저를 이끈 적이 없습니다. 수 십 년간 산을 다니며 차곡차곡 모아두신 여러 이야기들. 할머니가 보았던 장면들을 저에게 모두 보여주고 싶으신 것 같았어요. 인왕산은 커다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산이라 동식물에게 척박한 산이지만 그 안에서 상생하며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는 것 같았어요. 산속 바위에 새겨진 인왕산 산신과 호랑이, 뿌리가 연결되어 있는 연리지 소나무, 정상 근처 바위 절벽에 뿌리내리고 자라고 있는 어린 소나무, 밧줄을 타고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쪽진 할머니 상 등... 인왕산 속에는 정말 많은 이야기와 상생이 있어요. 마치 산 아래 우리가 사는 모습들과 닮은 것만 같았어요. 아니 우리네 삶이 산을 닮은 거겠죠?


인왕산 아래 동네에 사는 저는 언제나 인왕산을 바라보게 됩니다. 집에서 나오면 바로 보이는 인왕산. 늘 저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웃어주고 있는 것 같은 인왕산. 엄마같이 푸근하게 마을을 안아주고 있는 것 같은 산. 400-500년 된 오래된 회화나무와 인사하며 서촌에서의 하루를 또 시작합니다.


비가 오는 여름날 문득 이 글이 생각나신다면

인왕산 수성동 계곡의 물소리를 한번 들어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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