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꿈꾸던 직업은 '기타'에 속했다.

좋아하는 일을 자꾸 미루던 30대 온라인 게임인의 첫 프리다이빙 여행_2편

by황제펭귄

2. 꿈꾸던 직업은 '기타'에 속했다.


어릴 적 장래희망은 보통 여러 번 바뀌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내 꿈은 꽤 질겼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장래희망을 적는 칸이 있으면 늘 같은 꿈을 적었다. 몇 년째 같은 꿈을 적는 나를 보고 어느 날 친구가 물었다.

“너는 그 꿈에 대한 확신이 있어?”

“아직 되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어. 우선 하고 싶은 마음은 있으니까, 되어보려고.”

돌이켜보면 꽤 나다운 대답이었다. 되어보지 않았으니 그 일이 나에게 맞는지 알 리 없었다. 오랜 시간을 들여 준비했는데 막상 적성에 맞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도 있었다. 그런데 생각만 해서는 답이 없었다. 그러니 일단 되어나 보자 싶었다.


어릴 때 나는 영어학원에서 외국인 원어민 선생님을 만나는 걸 좋아했다.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재미있었고, 익숙한 교실 안에 새로운 언어와 문화가 들어오는 느낌도 좋았다. 그러다 어린 마음에 생각한 것이다. 나도 외국인에게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잘 알려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 꿈이 나에게 꼭 맞을 거라는 확신은 없어도 해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관련 분야를 전공하면서는 내가 매일 아무렇지 않게 쓰던 한국어가 얼마나 어려운 언어인지 알게 됐다. 한글을 알려주는 것과 별개로 한국어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대학원에 가서는 내가 아는 것이 우주의 티끌보다도 못하다는 것도, 문화를 가르치려면 알아야 할 것이 끝도 없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쯤에는 어학당 선생님의 월급이 박봉이라는 현실도 알았다.


배울 것은 끝도 없고 현실은 넉넉하지 않았다. 그래도 공부했다. 그때의 나는 현실보다 꿈이 먼저였다.


마침내 어학당에 취직했고, 이후에는 대학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쳤다. 누군가는 여러 꿈을 거쳐 자기 일을 찾고, 누군가는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직업을 만난다. 나는 어릴 때 정한 꿈 하나를 오래 바라보다 그곳까지 갔다. 내게는 단순한 첫 온라인 게임이 아니었다. 거의 20년을 바라보고 도착한 곳이었다.


다행히 수업이 좋았다. 오지랖 있는 성격에 제법 적성도 맞았다. 처음에는 자기소개 몇 문장도 어려워하던 학생이 어느 날 긴 한국어로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선생님, 주말에 친구랑 여행을 갔는데요.”

‘-아/어요’, ‘-ㅂ/습니다’를 하나씩 익히던 학생이 어느 순간 ‘-는데요’를 자연스럽게 붙여 이야기를 이어갔다. ‘은/는’, ‘이/가’, ‘을/를’까지 제자리에 들어맞는 날이면 괜히 도파민이 터졌다. 그렇지. 그렇지! 몇 달 전만 해도 단어 몇 개로 대답하던 학생이 이제는 자기 경험을 설명하고, 농담을 하고, 속상했던 일과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까지 한국어로 이야기했다. 언어는 눈에 보이지 않는데, 실력이 늘어가는 순간은 뿌듯하게도 눈에 보였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학생들이 교실에 남아 말을 걸어오는 시간이 좋았다. 한국 생활의 고민이나 진로, 연애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관광 코스와 맛집을 추천해주는 선생님이 되기도 했다. 어떤 학생들은 나를 ‘잘 가르치는 예쁜 선생님’이라고 불렀고, 작은 팬클럽까지 만들었다. 이 문장을 내 손으로 쓰고 있자니 조금 민망하다. 그래도 사실이니 쓴다. 나를 그렇게까지 예쁘게 봐주는 마음이 고마웠고, 그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image.png카톡으로 나에게 사랑의 서프라이즈 메시지를 보냈던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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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나라였어도 그 시절 우리는 하나였다.


즐거운 마음으로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수업을 준비했다. 주변 선생님들도 나를 ‘진심인 선생님’, ‘잘하는 선생님’으로 봐주셨다. 덕분에 비교적 일찍 급주임과 프로젝트 실무를 맡았고, 나중에는 예비 한국어 교원을 가르치는 경력 교원으로도 일했다. 직바카라을 맡는다고 급여가 크게 늘지는 않았다. 그래도 진심으로 좋아했고, 계속 잘하고 싶었다. 그렇게 10년을 일했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현실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질기게 붙었다. 내가 일하던 어학당 시간강사의 계약은 보통 석 달이었다. 한 학기가 끝나면 다음 계약을 기다렸고, 경력이 5년을 넘어도 월급은 대략 150만 원에서 200만 원 정도였다. 내게는 4대 보험도 없었다.


행정 업무와 프로젝트를 함께 맡은 덕분에 나는 비교적 오래 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 학기까지 함께했던 선생님들이 다음 학기 시간표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일도 흔했다. 수업만 하면 되는 것도 아니었다. 계약된 수업 시간 외에 교안과 교재를 만들고 실습지와 활동 교구를 준비했으며, 학생 상담과 회의, 추가 행사까지 챙겼다.


그렇게 10년, 40번의 계절을 보냈다. 좋아했고, 그 일을 하기 위해 오랫동안 공부해 왔으니까. 좋아한다는 마음은 생각보다 사람을 오래 버티게 한다. 좋은 뜻으로도, 조금 위험한 뜻으로도.


처음에는 이상했던 것들도 오래 있으면 익숙해졌다. 석 달짜리 계약서, 4대 보험은 없는데 겸업 금지 조항은 있던 계약. 강의한 시간만큼 월급을 받으면서도 오전 수업이 끝난 뒤 오후 회의에 남고 저녁까지 지원 업무를 해야 했다. 그렇게 일하고도 소득을 증명하거나 은행 상품 상담을 할 때면 내 직업은 갑자기 흐릿해졌다.


어느 날은 큰 강당에서 법정 의무교육이 있었다. 갑작스럽게 시간강사들에게도 교육을 들으라는 안내가 내려왔다. 학생 상담이 있던 나는 다른 선생님들보다 늦게 강당으로 향했다. 교육장 등록대에는 참석자 서명부가 놓여 있었고, 이름 옆에는 신분을 표시하는 칸이 있었다.


정규직 □ 계약직 □ 교원/교수 □


나는 세 칸을 잠시 내려다봤다. 석 달짜리 계약을 이어가던 시간강사인 나는 어디에도 정확히 들어맞지 않았다. 옆에 있던 담당자에게 물었다.

“저는 어학당 시간강사인데 어디에 쓰면 될까요?”

그는 별다른 표정 없이 말했다.

“그건 선생님이 아시죠.”

말투가 조금 날카로웠지만 굳이 받아치지 않았다.

“아… 제가 몰라서요. 정규직도 아니고, 1년 이상 계약직도 아니고, 정식 교원도 아니라서요.”

그제야 담당자가 말했다.

“옆에 빈 공간에 그냥 ‘기타’라고 쓰세요.”

“네.”


나는 빈 곳에 ‘기타’라고 쓰고 체크했다.


영화였다면 여기서 손이 잠깐 멈췄을지도 모른다. 꿈을 꿨던 초등학교 1학년의 내가 등장하고, 대학 입학식과 대학원 졸업식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잔잔한 피아노 음악쯤 깔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의 나는 달랐다. 오랫동안 바라온 직업이 서명부 어디에도 들어맞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의무교육에 늦지 않는 게 먼저였다. 얼른 새 항목을 적고 강당으로 들어갔다. 슬프거나 충격적이지 않았다. 내가 어떤 자리에서 일하고 있는지는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교육을 마치고 나면 또 다음 수업을 준비해야 했다.


그 장면은 훨씬 나중에 다시 떠올랐다. 새로운 온라인 게임에서 제대로 된 근로계약서를 처음 받아 들었을 때였다. ‘아, 이런 게 계약서구나.’ 그제야 예전의 석 달짜리 계약서가 생각났다. 조건도 형식도 허술했지만, 당시에는 다음 학기에도 수업이 있다는 사실부터 확인하고 안도했다. 새 계약서를 읽고 있자니 예전에 내 자리를 찾지 못했던 체크박스가 떠올랐다.


체크박스 하나가 내가 해온 일을 없애는 건 아니었다. 다만 나이를 먹으면서 나도 현실적인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내 소득과 계약 조건으로는 집을 사기는커녕 전세대출을 받는 일부터 막막했다.


한때 동료 선생님들과 처우를 바꿔보려고 움직인 적도 있었다. 선배 선생님들이 오히려 말리고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이 그때는 답답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들에게도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목소리를 냈다가 내 수업뿐 아니라 다른 선생님들의 다음 학기 수업까지 사라질 수 있는 구조였으니까.


실제로 선생님들 사이에 개선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때, 이미 선발된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다시 면접이 진행됐고 시간강사가 절반 정도 줄어든 일도 있었다. 그 일을 겪고 나면 다음번에 말을 꺼내기가 더 어려웠다.


나도 멋진 커리어우먼처럼 내 계약 조건을 두고 당당하게 협상해보고 싶었다. 부당하다고 느끼는 조항에는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다. 하다못해 내가 하는 일을 제대로 된 직업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일한 만큼 보상받고, 소득을 증명하고, 앞으로의 삶을 계획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문제들을 계속 흐린 눈으로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괜히 문제를 제기했다가 다음 학기 수업이 사라질까 걱정됐고, 좁은 업계 안에서 ‘까다로운 강사’라는 소문이 날까 조심스러웠다. 내 수업만 사라지는 거라면 오히려 감당할 수 있었다. 더 두려운 건 내 작은 행동이 번져 후배 선생님들에게까지 불이익이 돌아가는 일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학기마다 다음 계약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목소리를 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즈음 한 교육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들어왔고, 나는 직업을 바꾸었다. 이후로도 한번 이직을 하여 지금은 정규직이고 근로계약서가 있으며 4대 보험이 있다. 월급은 매월 정해진 날짜에 들어온다. 은행에서 소득을 증명하고 대출을 상담하고 청약을 넣을 수 있다. 예전에는 ‘안정’이라는 말이 조금 심심했는데, 막상 가져보니 꽤 좋았다. 다음 달의 생활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미래를 계획할 수 있다는 것. 꿈꾸던 일을 할 때보다 오히려 그런 현실적인 것들이 내게 행복감을 주었다.


안정이냐 낭만이냐, 현실이냐 꿈이냐. 어느 하나를 골라 정답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레몬을 먹는 날도 있고 오렌지를 먹는 날도 있다. 어떤 때는 신 게 필요하고, 어떤 때는 조금 더 달콤한 게 필요한 것처럼 삶에서 원하는 것도 때마다 달라졌다. 무엇을 선택하든 내 삶의 영양분이 됐다.


image.png레몬이든 오렌지든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했을 때는 안정이 아쉬웠고, 안정을 얻고 나니 시간이 아쉬웠다. 참 공평한 건지, 얄미운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다시 돌아가 선택하라고 하면 아마 같은 길을 갈 것이다.


재미있는 건 그다음이었다. 꿈의 직업을 뒤로하고 새로운 분야에 뛰어든 뒤, 그 이후로도 오랜 기간 새 일을 익히고 버티느라 꽤 열심히 살았다. 그사이 허리디스크와 위염, 손목터널증후군까지 차례로 겪었다. 어렵게 얻은 생활을 유지하느라 이번에는 다른 좋아하는 것들을 뒤로 미루기 시작했다. 어느새 프리다이빙 여행 하나를 1년째 미루고 있었다.


그즈음 동생은 나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집에서 가깝고 안정적인 온라인 게임에서 인정받으며 10년을 일한 동생은, 올해 그곳을 그만두었다. 자기가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꿈을 먼저 살아보고 안정 쪽으로 왔고, 동생은 안정을 오래 살아보다 자기 꿈 쪽으로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이 말했다.

“언니, 프리다이빙 여행 갈래?”

내 대답은 생각보다 빨리 튀어나왔다.

“와! 진짜 가자!”


모카포트처럼,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 안에서 끓던 것이 보글보글 밀려 올라왔다. ‘나중에’와 ‘언젠가’ 속에 눌러두었던 바다가 동생의 한마디에 한꺼번에 끓어올랐다.


끓어올랐다는 것은 준비가 되었다는 것


내가 좋아하는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는 오랫동안 물을 그렸다. 그의 그림을 보면 가만히 있는 것 같다가도 계속 움직이고, 보는 순간마다 모양과 빛이 달라지는 물을 떠올리게 된다. 이제는 그 물속에 내가 직접 들어갈 차례였다. 마음 한가운데서 먼저 소리가 났다.


첨벙!


AA.27204999.1.jpgDavid Hockney | A Bigger Splash, (1967)
“물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중 하나입니다.
물은 항상 변화하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물은 생명과 재생의 상징입니다.”
— 2019년 서울시립미술관 《데이비드 호크니》 전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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