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영어공부] 학원과 숙제

by다락방

내가 잘 모르는 나에 대한 어떤 점을 살면서 천천히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이를테면 나의 경우, 어떤 강제성이 없는 상황에서는 성취를 낼 수 없다는 것이 있겠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마감에 닥쳐 일을 마무리하고, 또 많은 학생들이 시험 전날 벼락치기를 한다지만, 나 역시 바로 대표적으로 그런 케이스중의 하나인 사람인 것 같다.


잠깐 대학 시절 얘기를 하자면, 돌이켜봤을 때, 갑자기 엄청나게 주어진 자유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것 같다. 물론 여전히 성실한 자세로 아르바이트를 4년 내내 하기는 했지만,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내게 너무나 매력적이었고, 그래서 가지 않는 시간을 정말 많이 보냈다. 학사경고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너무 아픈게 아니라면 학교는 필히 가야하는 것이었는데, 대학교는 그렇지 않았던거다. 내가 학교를 빠져도 집에서 알 리도 없고 누가 나를 혼내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내 대학시절은 정말 엉망진창이었다. 비싼 등록금 주고 시간을 날린 대표적인 시기였다. 지금도 나의 대학시절은, 그래서 후회가 된다.


이제는 안다. 그 때 강제성이 없는 것이 나를 어쩔 줄 모르게 했다는 것을. 입으로는 자유를 부르짖지만, 정작 자유가 주어지면 나는 내 의지로 뭔가 성과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운동도 자기 의지지, 왜 돈 내고 gym 에 다녀? 라고 했던 내가, 그러나 내 의지로 운동을 했던가. 어쩔 수 없이 요가센터에 등록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운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싱가폴에 학교를 다니면서 나는 그나마 영어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가고, 어쨌든 수업 시간에 수업을 듣고, 집에 와서 숙제를 하는 것이 존재했기 때문에, 그래도 영어 공부가 좀 된게 아닌가 싶은거다. 당시에도 학교를 다니는게 피곤하고, 내가 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 고생을 하고 있나 싶었지만, 그러나 그게 아닌 채로 같은 시간을 주고 '영어 공부 니가 알아서 해라' 라고 했으면, 나는 아마 6개월을 허투루 날려버렸을 것이다.


어학연수를 마치고 한국에 오니, 거리에서 들리는 말들이 죄다 한국어라 너무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래서 영어 공부를 계속 해야지, 라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아, 내가 역시나 내 의지로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구나. 그렇게 시간만 낭비하다가 2주 전에 학원에 등록했다. 일대일로 교포에게 영어 회화를 배우는거다. 내가 왜 돈을 들여서 이 짓을 해야하나, 싶다가 막상 수업을 들어보니, 난 이걸 해야 하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숙제도 내주는데, 숙제를 내주니까 어쨌든 숙제를 해야하잖아? 그러다보니 내가 학원을 다니지 않았던 때보다 영어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아진거다. 물론, 딱 학원만 가고 딱 숙제만 하기 때문에 그 절대적 시간이 결코 많은 건 아니다. 아마 성실히 자기 의지로 공부하는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영어 공부에 투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딱 학원에서 배우는 만큼만, 딱 숙제하는 만큼만 시간을 쓴다. 그런데,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이만큼도 하지 않았을 것 같은 거다.


아, 나라는 인간, 이 강제성을 싫어하면서, 피곤해하면서, 그러나 이 강제성 때문에 그나마 멈추지 않을 수 있구나. 내가 무언가 성과를 내려면 혹은 성취를 하려면, 이 강제성은 나에게 필요하겠구나.


일주일에 한 번, 오십분씩 수업을 받는다. 숙제 하는 데에는 사실 10분 정도밖에 안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학원에 등록하지 않았다면, 이것조차 없었을 것이다. 이놈의 강제성은, 싫지만, 그런데 필요하다. 적어도 나에게는.


아니, 그런데 나는, 애초에 왜, 도대체 왜, 영어를 잘하고 싶어서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는가. 그냥 '영어 못하는 나'를 받아들이고 살면 학원비를 없애지 않아도 됐을 것이고, 내 영어 왜이렇게 쪼렙이야, 하면서 스트레스 받지도 않았을텐데. 사람의 기질이란 무엇인가, 운명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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