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 침묵의 봄)
On the mornings that had once throbbed with the dawn chorus [...] there was now no sound; only silence lay over the fields and woods and marsh.
한때 이른 아침 새들의 합창으로 가득했던 그곳에는 이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들판과 숲, 습지 위에는 오직 침묵만이 감돌았다.
- <침묵의 봄, Silent Spring> by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
<침묵의 봄> 서문에 나오는 유명한 문장이다. 새소리가 사라진 ‘침묵의 봄’이라니, 생각만 해도 섬뜩하고 삭막하다. 그런 날이 언젠가 올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은 아니기에 우리는 도시의 소음과 자동차 경적 소리에 묻혀 자연의 소리를 잊고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보다 유독 새 지저귀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달콤한 아침잠을 깨울 정도는 아니었기에 무시한 채 다시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새소리는 여전히 컸고,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어느 아침이었다. 문득 습관처럼 베란다 창문을 바라보다 45도 위쪽을 올려다본 순간, 눈을 의심했다. 세상에, 새가 둥지를 틀었다.
솔직히 감동보다는 황당함과 걱정이 앞섰다. ‘뱀이 올라오면 어쩌지?’, ‘새똥으로 베란다가 엉망이 되면 어쩌나.’ 당장 둥지를 치워버릴까 싶었지만, 이미 알을 품은 둥지는 법적으로도, 도의적으로도 함부로 손댈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얼떨결에 우리 집은 새 가족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덕분에 일상은 예고 없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새들이 놀랄까 봐 베란다 문을 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고, 걸음걸이마저 숨을 죽이게 되었다. 내 집인데도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우스워 “그래도 어쩌겠어”라며 헛웃음을 짓기도 했지만, 날이 갈수록 닫힌 창문 너머를 흘끗거리는 횟수는 늘어만 갔다.
불편함이 조금씩 익숙해질 무렵, 창밖의 낯선 풍경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붉은 가슴을 가진 아빠 새 한 마리가 베란다 앞 높은 곳에 꼿꼿이 앉아 있었다. 처음엔 그저 쉬는 줄 알았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니, 엄마 새가 둥지에서 알을 품는 동안 아빠 새는 맞은편 베란다 등의 높은 곳에 앉아 망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변을 살피고, 작은 인기척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경계를 섰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닐 텐데, 사랑하는 존재가 가장 연약한 순간을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곁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가슴이 뭉클해졌다. 부모의 마음은 종을 넘어 모두 같나 보다. 저 작은 몸으로 가족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경계를 서고, 위험을 먼저 감당하려는 아빠 새의 모습이 감동을 넘어 숭고하게 다가왔다.
이제 베란다 문을 마음껏 열지 못하는 불편함은 대수롭지 않다. 그저 알을 품은 새 가족이 무사히 새 생명을 맞이하길 바랄 뿐이다. 요즘은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창밖을 내다보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부모 새들도 내가 익숙해졌는지 이제는 크게 경계하지 않는 눈치다.
새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누군가 이곳을 가장 안전한 보금자리로 선택했다는 뜻이리라. 어딘가에서는 또 다른 생명이 조용히 숨 쉬며 자라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처음엔 그저 불청객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녀석들은 우리 집을 소중한 생명을 잉태할 터로 선택해 준 귀한 손님이었다. 어쩐지 올여름 우리 집에 정말 좋은 행운이 깃들 것만 같다. 아가들아, 부디 조심히 잘 태어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