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이 있는 청탁이 있었고 마감이 없는 청탁이 있었다. 말이 마감이 없는 거지 그래도 며칠 안에는 써서 넘겨야 한다. 며칠이라니, 시나 소설을 쓰는 분들에게는 놀랄 표현일 수도 있겠다. 방송작가들의 마감은 며칠이 아니라 한 시간 뒤나 당장 내일 오전 라디오 오프닝일 때가 흔해서 며칠 정도면 뭐, 충분하다.
원고 청탁을 받으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딴짓이다. 모니터 위 커서는 바쁘게 깜빡이는데 갑자기 집에 있는 루버셔터가 누리끼리해보인다. 물티슈를 집어들고 한참을 닦았다. 송진가루가 범벅이었다. 산 속에 사는 티를 이렇게 낸다. 3년 동안 안 한 블라인드 청소를 하고 나니 갑자기 온라인카지노가 쓰고 싶어졌다. 온라인카지노에서는 글이 뜸하면 알림이 뜬다. 글쓰기는 운동과 같아서 어쩌고, 독자와의 약속인데 어쩌고 하는 내용으로 구박하는 알람이...
얼마 전에 온라인카지노에 "그녀의 물건들"이라는 제목의 카지노 게임을 하나 개설했다. 아직 글은 시작하지 못했다. 아니다, 거짓말이다. 시작은 했는데 발행할 자신이 없다. 그녀의 물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름대로 꽤 바쁜 6학년 학부모이다. 원래 아이가 해외에 혼자 가 있는 주말이라 단편소설 하나는 뚝딱 쓸 줄 알았는데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아니다. 거짓말이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진 않았고 <선배, 그 립스틱 바르지 마요.>를 재정주행했다. 로운이가 군대에 있다니, 실감이 나지 않아! 하면서. 핑계처럼 들리지만 그때그때 드라마를 공부하듯이 정주행한다. 나는 주말에 드라마 시청으로 시간을 낭비한 게 아니다. 공부한 거다!
드라마를 쓰겠다고 공부하던 22세의 내가 생각난다. 구성작가와 드라마작가를 동시에 하는 분들도 있던데. 소설을 쓰겠다고 공부하던 20세의 나도 생각난다. 소설가와 드라마작가를 동시에 하는 분들도 있던데. 심지어 의사와 드라마작가를 하시는 분도, 법조인과 드라마작가를 하시는 분도. 도대체 나는 뭐냐! 아무 것도 동시에 하지 못하고 있질 않느냐!
아이가 내일 한국에 온다. 그 핑계로 또 아무 것도 하지 못할 거다. 아무래도 오늘은 밤을 새워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