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자락길
아침 햇살이 서대문독립공원의 잔디밭을 부드럽게 비추는 시각,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을 나와 산행을
시작했다.
수없이 지나쳤던 옛 서대문형무소의 붉은 벽돌담과 푸른 하늘 아래 늠름하게 서 있는 독립문의 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고즈넉하게 다가온다. 조그마한 배낭을 고쳐 메고 한성과학고 방향의 오르막길을 향한다
매일 아침 걸음 수 측정 앱을 켜며 하루 8천 보 이상, 가능하면 만 보 이상을 걷는 것이 어느덧 소소한 일상이 되었다. 도시의 아스팔트 위에서 채우는 걸음도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이렇게 나무와 흙이 숨 쉬는 산길에서 채우는 발자국은 몸뿐만 아니라 지친 마음까지 깊게 다독여준다.
얼마쯤 경사진 길을 올라서자 비로소 안산 자락길의 입구가 반갑게 맞이한다.
안산 자락길은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순환형 무장애 데크로드다.
경사가 완만하게 이어져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 없이 걸을 수 있고, 숲의 깊은 품으로 들어가는 길목마다 편안한 쉼터를 내어준다.
데크길 초입에 들어서서 숨을 깊게 내쉬자, 도심의 매캐한 공기 대신 나무와 흙이 어우러진 알싸하고 산뜻한 향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자락길로 접어드니 발밑에서 차분하게 울리는 나무 데크 소리가 걸음의 리듬을 만들어준다.
길 양옆으로는 소나무와 참나무, 그리고 곧게 뻗은 메타세쿼이아가 빽빽이 들어서 있어 햇살을 적당히 가려주었다.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햇살은 마치 길 위에 쏟아지는 작은 금가루 같았다.
길을 따라 나지막하게 걷다 보니 조용하게 흐르는 봉화천 약수터가 나타났다. 안내판 아래 정성스레 놓인 자그마한 바가지와 청결하게 정돈된 주변 풍경에서 이 길을 가꾸고 아끼는 이들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약수터 옆 쉼터에는 손때 묻은 청소용 수경과 알록달록한 자루자루의 비가 가지런히 걸려 있다. 산을 찾는 이들이 스스로 제 자리를 쓸고 닦으며 만들었을 정겨운 온기가 마음에 잔잔한 울림을 준다.
조금 더 걸어가자 숲 속 작은 연못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풀 사이로 맑은 물이 감돌고, 물풀들이 햇살을 받아 연둣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연못가 나무 펜스에 기대어 가만히 수면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잔물결이 일며 하늘과 나무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세월의 흐름 속에 많은 일들이 지나갔지만, 자연은 언제나 이처럼 제 자리에서 제 속도대로 계절을 맞이하고 흐르고 있다.
벤치에 잠시 앉아 배낭을 풀어 사과 한 개를 먹으면서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았다.
치열했던 온라인 게임 생활 40여 년, 매일같이 시계바퀴처럼 돌아가던 업무와 바카라무의 시간 속에서 나는 늘 어디론가 바쁘게 달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은퇴 후 들어선 이 길 위에서는 조급해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저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딛는 그 순간 자체가 완성이고 행복이다.
자락길 전망대에 다다르자 탁 트인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발아래로는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 단지와 빌딩들이 펼쳐져 있고, 그 뒤로는 인왕산의 기암괴석과 북한산의 보현봉이 조망된다 ㆍ도심의 소음은 아득하게 멀어지고, 오직 청량한 산바람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멀리서 바라보면 저토록 아늑하고 아름답다. 가까이서 볼 때는 복잡하고 무겁게만 느껴지던 일상의 고민들도, 이처럼 높고 넓은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저 흘러가는 한 조각구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전망대를 지나 오솔길과 흙길을 번갈아 걸으며 안산을 넓게 한 바퀴 돌았다. 데크길이 주는 편안함도 좋았지만, 간간이 만나는 오리지널 흙길에서 느껴지는 폭신한 감촉과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소리는 산행의 묘미를 더해준다.
발끝으로 전달되는 지면의 울림을 느끼며 걷다 보니, 어느새 마음속 깊은 곳까지 차분한 평정심이 차올랐다.
어느덧 주머니 속 스마트폰의 걸음 수 수치가 1만 3천 보를 넘어서고 있다.
평소 목표로 삼던 8천 보나 만 보를 훌쩍 뛰어넘는 걸음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다리의 피로감보다는 가슴 가득 채워진 청량함과 뿌듯함이 더욱 컸다.
1만 3천 번의 발걸음 동안 나 자신과 나누었던 수많은 대화, 숲이 건네준 피톤치드, 그리고 계절의 미묘한 변화를 오감으로 느낀 시간들이 모두 귀한 양식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리라.
산길을 내려오는 발걸음은 올라갈 때보다 훨씬 가볍고 경쾌했다. 다시 출발지였던 독립문역 근처로 내려오니, 멀리 영천시장의 정겨운 온기와 사람 사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불어오는 듯했다.
땀을 흘린 뒤 맛보는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이나 소박한 먹거리 생각이 절로 나 미소가 지어졌다.
오늘 걸었던 안산 자락길의 1만 3천 보는 단순한 운동이나 산바카라 이상의 의미였다.
그것은 지나온 삶을 차분하게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고, 자연이 내어주는 무조건적인 위로를 받아들이는 치유의 여정이었다.
산을 내려오며 다짐해 본다.
삶의 길에서도 조급해하거나 타인과 비교하며 서두르지 않으리라.
안산 자락길의 완만한 데크처럼, 때로는 천천히 시인처럼 사색하고 때로는 굳건하게 발걸음을 내딛으며 나만의 속도로 정성스럽게 살아가리라.
맑은 가을 하늘 아래, 안산이 건네준 푸른 기운을 품고 다시 기분 좋은 일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