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인생 후반전

까치울역 산바카라

by자봉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늙어간다는 것은 과연 인생이라는 긴 여정의 오르막길일까, 아니면 경사를 내려가는 내리막길일까.

젊은 시절에는 높이 올라가는 것만이 인생의 전부라 믿으며 숨 가쁘게 앞만 보고 달렸다.

더 높은 고지, 더 화려한 정상에 올라서야만 승리자인 줄 알았고, 그 과정에서 겪는 숨차고 힘겨운 순간마저 당연한 것처럼 여겼다.


하지만 은퇴를 하고 인생의 후반기에 접어든 지금, 비로소 깨닫게 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단순한 내리막길이나 쇠퇴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사람마다 각기 다른 의미로 다가오겠지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 인생 후반기는 정상을 향해 치열하게 다투던 때를 지나, 고즈넉하고 넓은 능선길에 올라 주위의 아름다운 풍경을 여유롭게 바라보는 보람찬 시간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저 세월에 이끌려 기운 없이 몸만 늙어가는 ‘노인’이 되기보다는, 고집을 내려놓고 주변에 양보하며 베풀고 이해하는 진정한 ‘어르신’이 되어가기 위해 매일 마음을 가다듬고 노력하고 있다.

오늘도 가을 기운이 촉촉이 스며들어 , 마음 통하는 옛 친구들과 반가운 나들이에 나섰다.

시골 읍내 중학교 시절을 함께 보내며 검정고무신 신고 들판을 누비던 동창 세 명이 모처럼 뜻을 모은 것이다.


지하철 7호선 까치울역 근처에서 만나 맛깔스러운 음식으로 속을 든든히 채운 뒤, 부천시에서 성지 순례길처럼 곱고 잘 정돈해 놓은 둘레길과 식물원 정원으로 향했다.

지하철역에서 멀지 않아 접근성도 참 좋았지만, 무엇보다 시에서 정성껏 가꾸어 놓은 꽃길과 숲길이 눈을 사로잡았다.


입장료 5,000원이 전혀 아깝지 않을 만큼 만발한 국화와 가을 꽃들, 조형물과 맑은 산바카라로가 나란히 펼쳐져 있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서로 선뜻 주머니를 열었다.


양천에서 국장과 본부장으로 은퇴했던 광종친구와

대기업에서 은퇴후 골프장 운영으로 성공한 성욱친구는 "내가 점심값을 낼 테니 자네는 커피나 한 잔 사게나." 서로에게 조그만 것 하나라도 더 베풀려는 그 다정한 마음들이 서로 통한다

점심 식사를 끝 내고 손에 차 한 잔씩 들고 가을 정취로 물든 둘레길을 천천히 걸었다.

길을 걷다 나무 그늘이나 푹신한 에어소파가 눈에 띄면, 우리는 아무 곳에나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머니에서 땅콩 한 봉지를 꺼내 까 나누어 먹으며 신발을 벗고 발을 편히 쉴 때, 세상 그 어떤 호화로운 여행지보다도 커다란 평온함과 만족감이 찾아왔다.


세상 살다 보면 언제나 온갖 소문과 다툼, 시끄러운 이야기들로 번잡하기 마련이다. 복잡한 도심 한가운데나 TV 뉴스 속에는 서로 잘났다며 다투는 시비와 소음이 넘쳐나지만, 이렇게 한 걸음 물러나 자연 속에 들어오면 그 모든 것이 한낱 부질없는 바람처럼 사라져버린다.

숲길 끝자락에 퍼지는 가을 햇살 아래, 초록빛 나무들과 야외 미술 조형물, 그리고 화려한 꽃밭을 바라보며 좋은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는 시간들이 소중하게 우리는 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서로의 깊은 속마음을 터놓고, 잘되고 못됨을 따지지 않는 절친한 동창들과 어울려 산바카라하고 눈으로 예술과 자연을 즐기는 이 순간이야말로 인생 후반기가 우리에게 준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선물일 것이다.


인생의 오르막길을 오를 때는 정상을 향한 욕심과 경쟁 때문에 주위의 아름다운 들꽃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내려오고 걷는 이 길에서는 길가의 자그마한 야생화 한 송이, 친구의 넉넉한 웃음소리,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 한 조각까지 모두 소중하게 가슴에 와닿는다.

늙어간다는 것은 서글픈 사라짐이 아니라, 고집을 비우고 넓은 마음으로 타인을 감싸 안으며 베푸는 ‘익어감’이다.


오늘처럼 정겨운 친구들과 나란히 걸으며 따스한 온기를 나누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그늘을 발견하면 소박한 기쁨에 감사할 줄 아는 삶.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를 너그럽게 품어 넘기고, 먼저 다가가 마음을 열고 나누어주는 어르신의 길. 오늘 7호선 까치울역 근처에서의 가을 산바카라은 나에게 앞으로 남아있는 인생의 후반기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조용히 이야기해 주었다.


오늘 하루도 좋은 친구들과 더없이 소중하고 감사한 추억 한 조각을 마음에 깊이 새긴다.

앞으로 다가올 날들도 이처럼 따스하고 인자한 마음으로, 향기롭게 익어가는 참된 ‘어르신’으로서 아름다운 삶의 길을 담담히 걸어가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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