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곡 서울 식물원
개천절 연휴 이틀 한가운데 날이다,
서늘해진 아침 공기를 가르며 공덕역에서
마곡나루역으로 떠나본다
매일같이 자주 만나는 풍경이지만
마곡나루역으로 달리는 공항철도 차창 밖 풍경 속으로 지나온 청춘의 나날과 다가올 삶의 여백들이 조용히 교차한다.
공항철도 마곡나루역을 나와 마주한 서울식물원은 도심 속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넓고 평온한 품으로 맞이해 준다.
입구에서 입장권을 구입할려고 했더니 65세 이상은 무료 입장 혜택을 안내 받으며 마음 한구석이 훈훈해졌다.
평생을 슬롯와 국가를 위해 묵묵히 소임을 다해온 세월에 대한 작지만 정당한 보상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인생의 후반기에 접어들어 누리는 이러한 소소한 혜택들은 지나온 날들에 대한 따스한 위로이자 삶의 기쁨이 되어준다.
야외 주제원을 서서히 구경하면서 웅장한 유리 온실 안으로 발을 내딛자 계절을 잊은 공기의 느낌을 받는다 ㆍ
서늘한 가을이 찾아와도 늘 푸른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을 이 공간이 참으로 고마웠다.
이국적인 열대 식물들과 지중해의 이름 모를 나무들 사이를 거닐며, 자연이 건네는 고요한 언어에 귀를 기울였다.
오랜 세월 동안 온라인 게임에서 동고동락했던 선배와 함께 식물원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세월의 흔적을 담은 올리브유 나무의 억센 줄기, 수줍게 고개를 내민 난초의 순백함 속에서 정성스레 가꾸어진 정원의 인공미를 느꼈다.
세차게 쏟아지는 대단한 폭포는 아니었지만, 아기자기하게 다듬어진 인공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는 가슴속 묵은 찌꺼기까지 깨끗이 씻어내어 주었다.
정겨운 풍경을 배경으로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다 보니 마음에 소년 같은 웃음이 배어 나왔다.
식물원 4층의 담백한 구내식당에서 함께 점심을 나누고, 카페로 자리를 옮겨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기울였다.
요즘 세대들의 합리적인 문화대로 각자의 몫을 나누어 내는 'N분의 1'의 관계는 서로에게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오랫동안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지혜로운 교류의 방식이다.
식사를 마친 후 호수 주변과 소나무 단지를 따라 걸었다.
붉고 노랗게 물들어가는 나뭇잎 사이로 바람이 스칠 때마다 벤치에 앉아 가을의 깊이를 만끽했다.
공원 곳곳에는 가족과 친구들이 모여 돗자리를 깔고, 캠핑 의자에 앉아 여유를 즐기고 있다.
굳이 멀리 떠나지 않아도 누릴 수 있는 도심 속의 이 평화로움이 가슴 깊이 와닿았다.
마곡이라는 새로운 공간을 조성하며 이토록 넓은 호수와 공원을 품어내고, 조금만 더 걸어가면 한강의 탁 트인 물줄기를 만날 수 있게 가꿔놓은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발길 닿는 곳마다 잘 정리된 산바카라로와 쉼터가 이어지니, 역시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도시의 살기좋은 인프라와 배려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흔히 나이가 들면 복잡한 도시를 벗어나 지방의 전원주택을 꿈꾸곤 한다.
그러나 막상 터전을 옮겼다가 의료와 교통, 문화적 고립 때문에 다시 돌아오는 이들을 여럿 보았다.
인생의 후반기일수록 잘 갖춰진 교통과 문화 시설이 있는 서울이라는 품 안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게 된다.
큰 돈을 들이지 않아도 매일 아침 신발 끈을 매고 거리에 나서고, 마음 맞는 사람과 부담 없는 온도로 온기를 나누며, 자연이 주는 사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는 삶. 이것이야말로 인생 2막을 건강하고 설레게 살아가는 가장 아름다운 지혜가 아닐까 싶다.
어느덧 스마트폰에 기록된 걸음 수 계기판이 15,000보를 가리키고 있다.
가을 바람은 시원웠지만, 몸과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싱그럽고 든든했다. 단풍이 깊어질수록 산의 색이 한층 오묘해지듯, 내가 걸어가는 인생의 후반기 역시 날마다 더 그윽하고 은은한 빛을 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