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집을 비워가며

by자봉

어느덧 창밖의 나뭇잎들이 짙은 녹음을 넘어 조금씩 옅은 빛깔로 옷을 갈아입는 계절이다. 지나온 시간을 가만히 되짚어보면, 나의 젊은 날은 참으로 무언가를 부지런히 채워 넣는 나날이었다. 더 넓은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일터에서는 한 걸음이라도 더 높이 올라서며, 남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번듯한 결실을 얻어내기 위해 가쁜 숨을 내쉬며 달렸다.


세상이 정해놓은 성공의 기준에 맞추려 애쓰다 보니, 손아귀에 쥔 것을 놓치지 않으려 손가락마저 온통 굳어져 있곤 했다.

돌아보면 그 치열함 덕분에 오늘날의 안정이 만들어졌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채우기에만 몰두했던 삶의 이면에는 늘 묵직한 중력 같은 무게감이 따라붙었다.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뒤처질까 봐 불안해하던 조급함,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대한 조바심, 그리고 때로는 사람 관계에서 오는 자잘한 서운함과 원망까지 마음의 곳간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

그 시절에는 손에 쥔 것이 많아야 삶이 풍요로워지는 줄 알았고, 내 마음속을 가득 채운 생각들이 모두 버릴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라 믿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70세에 다다르고 보니, 그토록 단단히 쥐고 있던 것들 중 상당수가 사실은 마음의 짐에 불과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노후의 괴로움은 세월의 흐름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미련과 사람에게 받은 상처, 그리고 이루지 못한 욕심을 끝까지 품고 내려놓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젊은 날의 삶이 ‘더 많이’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었다면, 나이가 들어갈수록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더 편안히’ 살아가는 지혜다.

가만히 거울을 들여다본다. 눈가에 깊게 파인 주름과 듬성해진 머리칼은 한 세월을 치열하게 살아왔다는 훈장이자, 이제는 조금 천천히 걸어가라는 몸의 다정한 권유이기도 하다.

얼마 전 오래된 서랍장을 정리하다가 까맣게 잊고 지내던 빛바랜 공바카라과 서류들을 발견했다.


한때는 인생이 걸린 듯 서슬 퍼렇게 고민하고 밤잠을 설치게 했던 일들이었는데, 지금 와서 읽어보니 그저 빙긋 웃음이 나오는 아득한 옛이야기일 뿐이었다. 살면서 믿었던 이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뜻밖의 사기를 당해 밤을 지새우며 울분을 토했던 일, 친구와의 오해로 마음이 굳어버렸던 기억, 그리고 몇 번이고 되새기며 스스로를 자바카라했던 실패의 순간들까지.

그 시절에는 그 상처들이 절대로 아물지 않을 영원한 흉터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무심하게 흐르는 세월이라는 커다란 강물은 그 강렬했던 분노와 억울함마저 조금씩 마모시키고 유순하게 다듬어 놓았다.


세월 속에 지난날을 가만히 흘려보낼 줄 아는 지혜는, 아무런 노력 없이 그냥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나간 일과 조용히 화해하고, 내 마음에 상처를 주었던 이들을 향했던 미움의 날을 무디게 가다듬으려는 스스로의 결단이 필요하다. 마음속에서 미움이나 원망의 덩어리를 하나씩 비워낼 때마다, 놀랍게도 삶은 그만큼 가벼워지고 그 가벼워진 빈자리에 깊은 평안이 조용히 찾아온다.

흔히 노후의 행복을 말할 때 경제적인 유복함이나 특별한 건강 비결을 먼저 떠올린다.

물론 기본적인 안락함을 누릴 여유와 건강한 신체는 삶의 소중한 바탕이 된다. 그러나 수많은 날을 지나며 깨달은 참된 행복은 외적인 조건보다 ‘마음의 정리’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재산이 풍족하고 몸이 건강하더라도, 마음속에 여전히 누군가를 향한 앙금이나 풀리지 않은 욕심이 자리 잡고 있다면 그 삶은 결코 평화로울 수 없다.

반대로 비록 손에 쥐어진 것이 소박하고 일상이 단조로울지라도, 마음을 말끔히 비워낸 사람의 하루는 늘 차고 넘치는 풍요로움으로 가득하다. 지나간 과거는 이미 내 손을 떠난 일이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 또한 내가 미리 당겨서 걱정할 영역이 아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다스리고 누릴 수 있는 시간은 오직 ‘오늘 하루’뿐이다.

아침에 눈을 떠 창문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을 맞이하는 일,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좋아하는 바카라의 문장을 천천히 음미하는 일, 걸어서 만나는 길가의 소박한 들꽃에 눈길을 주는 일, 그리고 그리운 이에게 먼저 안부를 물으며 환하게 웃는 일. 행복은 이처럼 멀리 있는 거창하거나 특별한 성취가 아니다. 많이 웃고, 조금 덜 욕심내며, 타인을 미워하는 대신 오늘이라는 선물 같은 하루를 감사히 살아가는 그 마음속에 이미 행복은 깃들어 있다.


인생의 황혼은 결코 모든 것이 시들어가는 쓸쓸한 끝이 아니다.

어쩌면 인생 전체를 통틀어 가장 깊고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 계절일지도 모른다. 봄의 화려한 꽃잎이나 여름의 무성한 녹음도 아름답지만, 단풍이 붉게 물드는 가을과 모든 것을 비워낸 겨울의 고요함에는 그 어떤 계절도 따라올 수 없는 숙연함과 고결함이 서려 있다.

세월이 흘러 겉모습은 자연스레 늙어가겠지만, 마음까지 타성이나 집착에 젖어 늙어버려서는 안 될 일이다.

곁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타인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편안한 온기를 전해주는 사람, 욕심을 내려놓은 넉넉한 품으로 주변을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사람, 그리고 훗날 세상을 떠난 뒤에도 함께했던 이들에게 다정한 기억으로 오래도록 남는 사람. 그런 삶이야말로 노년의 시간을 진정으로 가치 있게 살아가는 모습일 것이다.

지나온 날들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은 이제 세월의 바람에 부드럽게 날려 보낸다


오늘을 살아가는 내 마음의 집을 온전히 비우고 정돈하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황혼의 길을 걸어간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은은하게 피어나는 평안을 느끼며, 오늘 하루 주어진 삶의 순간들에 참으로 깊은 감사함을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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