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찬가2

문래공원과 스크린 골프

by자봉

어느덧 초가을을 물씬 느껴지는 가을날,

지하철 2호선 열차에서 내려 문래역 6번 출구를 향해 계단을 올라선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사이로 서늘하면서도 알싸한 가을 공기가 마중을 나온다. 은퇴 후 삶의 속도를 한 템포 낮추면서 건강을 챙기고 소소한 취미를 누리는 일은 내 일상의 소중한 지표이자 일과의 중심이 되었다.


오늘도 시간적인 여유를 듬뿍 안고 문래동으로 향했다.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온 고교 동창, 옛 동료들과 정기적으로 모여 스크린골프를 치고 담소를 나누는 날이다.

멈추지 않고 소통하며 화면 속 푸른 잔디를 향해 클럽을 휘두르는 순간은, 노년에 접어든 나에게 잊었던 청춘의 활력과 건강을 선물해 주는 귀한 시간이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서둘러 나온 것은 오랜만에 문래역 옆 공원을 조용히 한 바퀴 돌아보고 싶어서였다.

약속 장소로 곧장 가기 전,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을 갈아입는 공원의 나무들과 인사를 나누는 일은 내 오래된 습관 중 하나다.


역 출구를 빠져나오자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낯선 푸른 그늘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동안 가림막이 설치되고 공사가 한창이더니, 최근 대대적인 정비 사업을 마치고 새 단장을 하여 문을 연 문래근린공원이다. 수십 년 동안 이 자리를 지키며 도심의 소음을 막아주던 고목들은 여전히 든든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지만, 그 아래 펼쳐진 풍경은 마치 오랫동안 입었던 낡은 옷을 벗어 던지고 정갈한 새 옷으로 갈아입은 듯 단정하고 생기가 넘쳤다.


공원 입구에 발을 내딛자마자 단번에 눈에 들어온 것은 완만하게 공원 전체를 감싸 안으며 이어진 새 단장한 공원길이었다.

예전의 공원은 울퉁불퉁한 흙길이었다

걸음이 서툰 어르신들이나 유모차를 미는 이들이 다니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턱턱 걸리고 다칠까 염려되던 자리였다.

그런데 이번 리모델링을 통해 걸음을 옮기는 이도, 어린아이의 손을 잡은 부모도 누구 하나 소외되지 않고 평등하게 땅을 밟고 바퀴를 굴리며 걸을 수 있도록 배려한 길이었다. 편안하고 탄력 있는 감촉을 느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숲 사이로 불어오는 서늘한 가을바람에 나뭇잎들이 사각거리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이 공원이 단순한 도심 속 휴식처를 넘어, 공간을 찾는 사람들의 지친 마음과 불편한 몸을 한층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성숙한 공간으로 거듭났음을 피부로 실감할 수 있었다.


길이란 본래 막힌 곳을 뚫고 떨어진 곳을 이어주는 법이다.

문래공원의 새 산바카라로는 사람과 사람, 자연과 사람,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다정하게 이어주는 훌륭한 다리가 되어 있었다.


문래동이라는 지명에는 글이 찾아오고 문화가 들어온다는 고상하고 풍류 어린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내 기억 속의 문래동은 한동안 '문래'라는 이름이 주는 부드러움보다는, 둔중하고 거친 철공소의 이미지로 먼저 각인되어 있던 곳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서울의 여러 곳을 다녔지만

30년 남짓 온라인 게임 생활을 하며 이 일대를 오갈 때마다, 문래동은 늘 쇠를 깎고 용접 불꽃을 튀기던 노동의 현장이었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선반 기계 소리, 둔탁한 망치질 소리, 그리고 골목마다 짙게 배어 있던 서슬 서린 기름 냄새와 쇠 냄새는 이 도시를 떠받치던 뜨거운 삶의 열기 그 자체였다.


지금도 공원 담장 너머 조금만 걸어가면 여전히 기계 소리가 낭창하게 울리고 쇠 냄새가 옅게 감돈다. 하지만 그 거친 철공소 골목 사이사이로 청년 예술가들이 하나둘 들어서 붉은 벽돌과 철제 문 위에 감성적인 그림을 그리고 공방을 열면서, 문래동은 '문래창작촌'이라는 이름으로 새 생명을 얻었다.

오래된 쇠락의 공간에 예술의 숨결이 불어넣어지고, 그 곁에 이렇게 푸르고 정갈한 생태 공원이 조성되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은 자못 신비롭기까지 하다.


땀 흘려 일하던 노동의 역사는 과거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예술과 자연이라는 새로운 옷을 입고 오늘을 사는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있다. 문래공원은 세월의 다채로운 겹을 한 품에 다정하게 안아주는 어머니의 품과도 같았다.


공원 한 바퀴를 천천히 돌다 나무 그늘 아래 정성스럽게 마련된 벤치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다.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가을 햇살이 부드럽게 어깨 위에 스쳐 지나간다.



아이들은 깨끗하게 정비된 놀이터에서 깔깔거리며 웃음소리를 터뜨린다.

잘 다듬어진 산바카라로를 따라 바지런히 걸음을 옮기는 동네 주민들의 얼굴에는 평온함과 여유가 가득하다. 그 평화로운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지나온 나의 삶과 걸어온 길들이 아련하게 스쳐 지나간다.

1980년대 초반 온라인 게임에 첫발을 내딛고 2018년 말 퇴직할 때까지, 3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나는 행정의 현장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수많은 민원과 과제를 처리하며 살아왔다. 돌아보면 늘 시간에 쫓기고 바카라임감에 어깨가 무거웠던 날들이었다.


치열했던 온라인 게임 생활을 마무리하고 슬롯에 나와

또 다른 삶을 이어가고 있지만, 은퇴 후 나에게 가장 큰 구원이자 위안이 되어준 것은 바로 '걷는 행위'였다.

하루 8,000보에서 10,000보를 목표로 삼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비로소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집 근처 경의숲과 안양천 변의 계절 변화를 관찰하며 걷던 길, 경의선 숲길의 활기찬 풍경 속을 누비던 길, 서대문 안산 자락길의 울창한 숲속 무장애 데크길을 따라 숨을 깊이 쉬던 순간들이 모두 내 삶의 영양이 되고 수필의 소재가 되어주었다.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다리를 움직여 이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자세히 관찰하는 일이며, 지나온 시간을 정리하고 앞으로 걸어갈 길의 방향을 조용히 묻는 철학적인 여정이다.


문래공원의 새로 정비된 길을 걸으며, 나는 다시 한번 내 인생의 소중한 발자국들을 되짚어보게 되었다.

벤치에서 일어나 다시 공원길을 걷는다.

이 문턱 없는 길을 걸으며 문득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져본다.

'나는 과연 내 마음속의 문턱을 얼마나 허물며 살아왔는가?'

나이가 들고 세상을 살아갈수록,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마음속에 수많은 턱과 벽을 쌓아 올리곤 한다. 내가 경험한 세월의 무게만을 고집하며 타인의 생각을 경계하고,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이들과 거리를 두며, 때로는 스스로 만든 한계와 선입견이라는 높은 문턱에 사로잡혀 주저앉기도 한다.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마음의 문턱은 낮아져야 마땅한데, 도리어 더 높고 견고해지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오늘 정갈하게 다시 태어난 문래공원의 새롭게 단장한 길은 나에게 조용한 가르침을 주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시설이 낡고 스러지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지만, 그 위에 온기 어린 배려와 정성을 더하면 이처럼 훌륭한 휴식과 회복의 공간이 탄생한다.


사람의 삶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서산으로 기우는 노년의 삶일지라도, 지나온 날들의 경험에 고집 대신 포용을 더하고, 타인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배려를 더한다면 우리의 노년 역시 문래공원의 가을처럼 깊고 아름답게 빛날 수 있을 것이다.


공원 한 바퀴를 크게 돌고 나니 약속 시간이 가까워져 왔다. 공원을 나서는 발걸음이 한결 가볍고 경쾌하다.

숲 사이로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상쾌하게 뺨을 스치고, 철공소의 망치 소리와 도시의 소음마저도 이 푸른 공원 속에서는 삶의 조화로운 교향곡처럼 아늑하게 어우러진다.

공원 출구를 나와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스크린골프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지상 7층에 위치한 스크린골프장에 들어서자 이미 도착한 고교 동창과

옛 온라인 게임 동료는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이 사람, 오늘따라 얼굴에 가을 햇살을 가득 얹고 왔구먼!"

"문래역에 일찍 내려서 새로 단장한 문래공원을 한 바퀴 걷다 왔네. 아주 길을 잘 만들어 놓았더군."

서로의 건강을 묻고 안부를 나누며 시원하게 타구를 날린다.

화면 속 푸른 페어웨이를 향해 공이 시원하게 날아갈 때마다 일상의 스트레스와 묵은 잡념들이 깨끗이 날아가는 듯하다.

은퇴 후 이렇게 함께 웃고 땀 흘릴 수 있는 소중한 친구들이 곁에 있고, 건장한 다리로 마음껏 걸을 수 있으며, 글을 쓰고 스윙을 할 수 있는 건강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함이 밀려온다.


오늘 문래공원의 정갈한 길에서 얻은 다정한 온기와 깨달음은 내 가슴속에 오래도록 잔잔한 울림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마음이 답답하거나 인생의 걸음이 무거워질 때면, 나는 언제든 지하철을 타고 이 문턱 없는 문래공원의 길을 다시 찾아와 조용히 거닐며 스스로에게 길을 묻게 될 것 같다.

가을은 깊어가고, 내 삶의 산바카라길 역시 더욱 깊고 단아하게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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