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우묵하게 깊어지고, 바람 끝에는 서늘한 가을 냄새가 실려 온다. 예부터 가을을 일러 ‘천고마비’의 계절이라 했다. 하늘은 높고 들판은 황금빛으로 익어 마음에 풍요를 안겨준다는 시절. 그러나 내 손에 들린 작은 휴대폰 액정은 풍요와는 거리가 멀다.
온라인 게임에서 정년퇴직후 물러나 세월을 흘려보낸 지 어느덧 10여 년. 한때는 일상의 경계가 무너질 정도로 요란하게 울려 대던 전화벨 소리가 이제는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조용해진 핸드폰을 가만히 내려놓다 보면, 하루에 몇 번 울리는 진동마저도 그저 냉정한 스팸 문자나 광고 전화일 뿐이다. 반가운 사람들의 이름도 뜨지 않는 차가운 액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를 둘러싼 세계의 온도가 한 뼘쯤 더 내려가는 듯한 착각이 든다.
젊은 날의 전화벨은 내가 세상에서 숨 쉬고 있다는 존재의 증명과도 같았다.
바쁘게 찾고 부르는 소리 속에서 내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위안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일을 내려놓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세상과 나 사이의 접점은 점점 얇아졌다.
조용해진 일상이 평화로움으로 다가오기보다는, 가끔은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잊혀가는 것 같은 아득한 외로움으로 덮쳐온다.
적막이 밀려올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사르르 피어오르는 얼굴들이 있다.
그리운 어머님, 그리고 늘 다정다감하게 대화를 나눴던 두 남동생과 따뜻했던 누님이다.
돌아보면 내 삶에서 가장 온화하고 눈부셨던 시절은 20여 년 전, 어머님과 우리 남매들끼리 한 세상에 함께 숨 쉬고 있을 때였다.
무슨 대단한 경사가 없어도 어머님의 품은 늘 따스했고, 살가운 남동생들과 누님이 곁에 있을 때는 어떤 시련도 외롭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눈빛 하나로 서로의 고단함을 읽어주던 혈육의 온기. 그때는 그 소소한 대화와 온기가 당연한 일상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세월은 기다려주지 않았고, 어머님을 시작으로 누님과 두 남동생마저 하나둘 저 먼 하늘나라로 떠나버렸다.
가장 소중했던 이들이 먼저 가버린 빈자리는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거대한 적막으로 남았다.
남아있는 다른 동생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음의 결이 맞지 않고 결이 다른 소통은 오히려 살아있는 이들 사이의 거리를 더 멀게 만든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났건만 생각과 마음이 통하지 않아 말이 겉돌 때면, 그 답답함은 가슴속에 응어리가 되어 얹힌다. 살아있는 형제와 마주앉아 있어도 느껴지는 이 깊은 고독감은, 먼 하늘나라로 가버린 이들에 대한 그리움을 더욱 간절하게 부추길 뿐이다.
창밖을 내다본다.
가을 하늘은 서럽도록 푸르고 맑다. 저렇게 눈부시게 좋은 날씨인데, 정작 내 마음속 하늘에는 짙은 구름만 가득하다.
"이런 게 인생인가."
혼잣말처럼 나지막이 탄식이 새어나온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세상은 참으로 허무하다.
손에 쥐려 애썼던 많은 것들이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결국 남는 것은 사람이요, 사람과 나누었던 온기뿐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
차라리 시간을 20년 전으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머님의 따뜻한 밥상을 마주하고, 다정한 남동생들과 술 한 잔 기울이며, 누님의 정겨운 목소리를 듣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내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그 시절의 하루와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헛된 상상을 해본다.
그러나 흐르는 강물을 되돌릴 수 없듯, 한번 지나간 시간과 떠나간 사람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을 알기에 가을날의 그리움은 더욱 쓰라리고 가슴 깊이 파고든다.
하지만 가만히 마음을 달래본다. 비록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고, 그리운 이들의 손을 다시 잡을 수는 없지만, 그분들이 내게 남겨준 사랑과 다정했던 기억만큼은 아직 내 안에 온전히 살아있다.
어머님이 주셨던 무조건적인 사랑, 남동생들과 나누었던 형제애, 누님의 따뜻한 마음은 세월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 영혼의 자산이다.
떠나간 이들을 이토록 간절히 그리워할 수 있는 것
또한, 내가 그만큼 따뜻한 사랑을 받고 자랐으며 누군가를 깊이 사랑했던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지금 손에 쥔 핸드폰은 조용하고 세상은 허무하게 느껴질지라도, 가슴속에 간직한 그 시절의 온기마저 빼앗길 수는 없다.
외로움이 깊어질 때마다 허무함에 굴복하기보다는, 그리운 이들과 함께했던 소중한 옛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어 보며 마음을 녹여보려 한다.
(멀리 떠나신 어머님과 동생 2명)
오늘따라 유난히 높은 가을 하늘을 향해 가만히 마음을 띄워 보낸다.
저 하늘 어딘가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을 어머님과 누님, 그리고 사랑하는 두 남동생에게 나지막이 안부를 건네본다.
"그곳에서는 부디 평안한지를... 언젠가 다시 만날 날까지, 나도 이곳에서 당신들이 남겨준 온기를 품고 차분히 걸어가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