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층 버스 앞에 앉아
회색빛 콘크리트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고층 건물들이 하늘을 가린 도심의 삶에 문득 숨이 막힐 때가 있다.
빌딩 숲 사이에 갇혀 살다 보면 내 눈이 찾는 것은 단 하나, 싱그럽고 푸릇푸릇한 녹색의 자연이다.
나의 고향은 공기가 맑고 푸른 산과 숲이 아늑하게 감싸 안은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초가을로 접어드는 이즈음이 되면 들녘은 수확의 기쁨을 준비하느라 분주해진다. 한 해 동안 햇살과 바람을 머금고 단단해진 벼이삭들이 고개를 숙이고, 들판 전체가 은은한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풍경.
그 정겹고 다정한 풍경이 가슴 깊은 곳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참을 수 없는 그리움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가방 하나 가볍게 메고 집을 나섰다. 용산역으로 향해 가평으로 가는 경춘선 ITX-청춘열차에 몸을 실었다. 열차가 쾌속으로 달리기 시작하자 창밖의 풍경도 기다려주지 않고 빠르게 뒤로 흘러갔다. 가평을 향해 속도를 내는 열차도 근사했지만,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지나치는 속도의 풍경이 아닌 깊이 내다보는 여유였다.
초가을의 산과 들을 조금 더 자세히, 조금 더 오랫동안 눈에 담고 싶었던 나는 가평역에서 내려 망설임 없이 일반 전철로 갈아탔다.
일반 전철은 청춘열차보다 느릿느릿, 제 속도를 지키며 달렸다.
천천히 운행하는 전철의 창밖으로 비로소 내가 그리워하던 풍경들이 다가왔다.
짙푸른 녹색을 품은 나지막한 산봉우리들, 밭에서 정성껏 자라나는 푸른 작물들, 그리고 들녘마다 다소곳이 고개를 내민 벼이삭들이 보였다. 속도를 줄이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 천천히 흘러가는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속에 답답하게 쌓였던 도심의 소음과 먼지들이 깨끗하게 씻겨 나가는 듯했다.
한참 동안 시골의 풍경을 즐기다 보니 어느덧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지하철을 타고 서울까지 돌아가려면 시간도 제법 걸릴 것 같아, 이번에는 마석역 역사앞에서 잠실 환승 주차장으로 향하는 광역버스에 올랐다.
마침 정류장에 들어선 버스는 높다란 2층 버스였다.
해외여행이나 TV 화면에서나 보던 2층 버스를 우리나라에서 실제로 타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계단을 올라 2층 가장 앞쪽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2층 높이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지금까지 내가 알던 도로의 풍경과 전혀 달랐다.
막힘없이 탁 트인 전경 속에서 버스가 도로를 달릴 때마다, 가로수의 나뭇잎들이 2층 창문 바로 옆까지 바짝 다가왔다. 손을 뻗으면 당장이라도 잡힐 듯 커다란 나뭇잎들이 창가를 스쳐 지나가는 모습은 참으로 신기하고 새로웠다.
나뭇잎과 눈을 맞추며, 도로변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초가을의 푸른 숲을 내려다보는 재미가 상상 이상으로 쏠쏠했다. 늘 다니던 길도 시선을 조금 높였을 뿐인데 이토록 색다르고 근사한 풍경이 되다니, 2층 버스에서 누리는 소소한 구경거리에 아이처럼 마음이 설레었다.
버스 창밖을 즐겁게 바라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기차나 지하철을 탈 때 어르신들에게 주어지는 경로 할인 혜택도 그렇고, 이렇게 우수한 교통 인프라와 편의시설을 갖춘 우리나라가 참 살기 좋은 나라라는 사실이다. 나이가 들어 혜택을 누리며 편안하게 여행할 수 있는 환경에 마음속 깊이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인생 1막 평생온라인 게임을 떠나 은퇴라는 이름으로 삶의 2막을 시작했지만, 나의 하루는 여전히 활기차고 분주하다.
이렇게 시간을 쪼개어 계절의 변화를 찾아 전국 여기저기를 유람하고, 발걸음을 부지런히 옮기며 건강을 위한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때로는 소소하게 용돈을 벌 수 있는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스스로 움직여 번 돈으로 맛있는 음식도 사 먹고 하고 싶은 일을 즐기는 삶.
세상은 흔히 은퇴를 쉼이나 물러남이라고 말하지만, 나에게 은퇴 이후의 삶은 또 다른 형태의 역동적인 인생이다.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마음이 끌리는 곳으로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며, 소소한 일거리와 운동이 공존하는 지금의 일상.
집으로 돌아오는 길, 2층 버스의 높은 창가에 올려둔 시선 끝에서 온통 초록색인 세상속에 저녁 노을이 걸렸다. 초가을 들판의 벼이삭에서 시작해 2층 버스 창가의 초록 나뭇잎으로 이어진 오늘 하루의 여정. 시간을 아껴 가며 부지런히 걷고, 보고, 느낀 이 소중한 시간들이 모여 내 삶을 한층 더 풍요롭게 채워주고 있다.
스스로 건강을 지키고 삶의 재미를 찾아가는 인생 2막의 길과 마석에 거주하는 온라인 게임 후배 영석이와의
소중한 만남과 점심 ㆍ커피타임 시간들이 참으로 즐겁고 감사하고 오늘 하루도 더없이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