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소음이 분주하게 얽혀 있는 지하철 6호선 한강진역에서 내려 땅 위로 발을 디디면, 도심의 경계가 무색하리만큼 울창한 나무들이 제일 먼저 길손을 반긴다.
1번 출구를 지나 옛 파출소 인근의 야트막한 언덕길에 올라서면, 마치 현실의 번잡함을 일시에 가려주듯 울창한 숲의 터널이 열린다.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아도 하늘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빽빽하게 가지를 늘어뜨린 나뭇잎들이 여름날의 뜨거운 햇살을 단단히 가려주니, 발걸음은 시작부터 한결 가볍고 청량하다.
도시의 시멘트 바닥에 익숙해진 발바닥이 남산의 부드러운 흙과 돌길을 밟으며 걷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의 몸은 자연의 오랜 박자와 호흡을 맞추게 된다.
그늘 깊은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보면 걷는 일 자체가 하나의 기쁨이요, 마음의 묵은 먼지를 털어내는 은근한 정화 과정이 된다.
어느덧 일상의 걱정거리는 숲이 내뿜는 맑은 공기 속으로 흩어지고, 온전히 나의 숨소리와 발자국 소리에 집중하게 되는 고요한 순간이 찾아온다.
숲길을 따라 남산의 허리를 타고 조금씩 올라가다 보면, 전국 팔도에서 모인 소나무들이 제각기 기품 있는 자태를 자랑하는 '팔도소나무 단지'에 이르게 된다.
저마다 곧게 뻗거나 그윽하게 굽어진 소나무 줄기들은 고난을 견뎌낸 우리네 인고의 세월을 닮아 있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깊은 위로를 준다. 최근에는 그 곁으로 파릇하고 정갈한 대나무를 빼곡히 심어 '죽림원'을 근사하게 새로 조성해 두었고, 신발을 벗고 맨발로 촉감을 느낄 수 있는 고운 황톳길도 정성스레 펼쳐 놓았다.
"맨발로 부드러운 황토흙을 딛는 순간, 땅의 따스하고 묵직한 기운이 온몸을 통해 머리끝까지 피어오른다. 세월의 무게로 지친 몸과 마음이 차분히 땅의 온기와 교감하며 다시금 건강한 생기를 회복하는 소중한 순간이다."
황톳길을 맨발로 천천히 걸어가니 발바닥에 닿는 감촉이 비단처럼 부드럽고 상쾌하다.
땅이 품고 있는 온기와 자연의 기운이 발끝을 통해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듯하여 몸도 마음도 단번에 건강해지는 뿌듯함이 밀려온다.
길 옆으로는 피톤치드 향이 은은하게 감돌고, 작은 돌들사이를 맑게 흘러내리는 실개천의 물소리가 청아한 악기처럼 귓가를 간지럽힌다.
숲 속에 마련된 자그마한 쉼터 의자에 앉아 집에서 정성스레 준비해 온 도시락과 간식을 꺼내어 맛보는 시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박하고도 깊은 행복이다.
땀을 식히며 마시는 한 모금의 시원한 물과 소소한 음식은 삶이 주는 참된 풍요가 결코 거창한 데에 있지 않음을 일깨워준다.
간식으로 기운을 차리고 다시 남산 등산로를 따라 오르막길을 향해 나아간다. 야생화원과 이끼원의 아름다운 풍경을 지나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제법 경사가 기울어져 숨이 차오르고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한다. 서서히 한 시간 남짓 꾸준히 걸어 오르는 동안, 다리의 종아리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하고 허벅지에는 단단한 힘이 실린다.
나이가 들수록 몸의 근육을 단련하는 일이 곧 삶의 의지를 다지는 일임을 알기에, 이 기분 좋은 통증과 자극은 스스로에게 주는 훈장처럼 반갑고 고맙기만 하다.
땀을 흘리며 마침내 도달한 남산 정상. 탁 트인 전망대에 서서 눈앞에 펼쳐진 서울의 전경을 조망하는 순간, 올라오며 겪었던 약간의 고단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가슴속 깊은 곳에서 밀려드는 거대한 보람과 감동만이 가득 찬다.
굽이굽이 흐르는 한강 줄기와 빽빽하게 들어선 빌딩 숲,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북한산 산자락이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시원함을 넘어 숭고함마저 느끼게 한다.
우리가 지나온 삶의 길도 어쩌면 이 남산 오솔길과 같지 않을까.
숲에 가려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때도 있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만나 숨이 차오르고 다리가 무거워질 때도 있지만,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성실하게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마침내 이처럼 넓고 푸른 세상을 조망할 수 있는 정상에 다다르게 되는 법이다.
정상에서 펼쳐진 도심의 장관을 마음껏 구경하고 깊은 호흡으로 남산의 기운을 가득 담은 뒤, 내리막길은 정겨운 일반 시내버스를 타고 충무로와 광화문 방향으로 유유히 내려왔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서울의 도심 풍경을 바라보며 시내에 내려서고, 다시 지하철로 환승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마음까지 넉넉해진다.
알뜰하게 교통비도 절약하고, 몸에는 건강한 활력을, 마음에는 깊은 여운을 채운 진정으로 풍요롭고 즐거운 하루였다. 이 소박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품고, 나는 내일의 삶을 향해 또 한 걸음 기꺼이 내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