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

by자봉

남동생은 불의의 교통사고로 예고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나는 아직도 그 일을 ‘죽음’이라는 말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마음속에서는 늘, 아주 먼 곳으로 잠시 떠나 있는 사람처럼 느껴질 뿐이다.

남자형제로 나는 집안의 첫째였고, 떠난 동생 금채는 둘째였다.

교정직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동생은 성실했고, 유난히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성격을 지닌 사람이었다.

말수가 많지 않았지만 주변을 살피는 눈이 따뜻해, 그와 함께 있으면 집 안 공기가 달라지곤 했다.

잠실종합운동장 체육시설관리사업소에서 근무하던 시절, 나는 옥탑방에서 여동생과 남동생, 세 사람이 함께 자취하며 살았다.

여름이면 지붕의 열기가 그대로 전해져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고, 겨울이면 찬 기운이 방바닥을 타고 올라와 이불을 몇 겹씩 덮어야 했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었지만, 그 좁은 공간에는 늘 웃음이 있었다.

결혼을 하고서도 동생과의 인연은 이어졌다. 신혼의 설렘보다 삶의 무게가 먼저 걸음을 재촉하던 시절이었다.

인천 용현동의 27평 아파트에 처제와 여동생, 남동생까지 함께 데리고 살았다.

큰딸과 작은딸은 그때 한 살, 세 살이었다. 집은 늘 비좁고 소란스러웠지만, 사람 사는 냄새로 가득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모든 상황을 묵묵히 받아들인 사람은 아내였다.

말없이 아이들을 돌보고, 말없이 식구들을 챙기며 살았다. 불평도 원망도 없던 그 침묵 속에 얼마나 큰 사랑이 담겨 있었는지,

나는 훗날에서야 깨달았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탓인지, 남동생과 막내 처제는 내 두 딸을 유난히 아끼고 사랑해 주었다.

삼촌인 금채의 품은 아이들에게 늘 편안한 자리였고, 아이들의 웃음은 금채에게 삶의 위안이 되었다.

큰딸 이 유치원에 다니던 다섯 살 무렵, 남동생 금채는 교통사고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버렸다.

아이들은 아직 죽음을 알지 못했다. 삼촌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서운해했을 뿐이었다.

고향에 내려갈 날을 앞두고, 어린 딸들은 용돈을 모아 문방구에서 작은 반지 하나를 사 왔다.

“삼촌한테 줄 거야.” 반짝이던 그 반지는 아이 마음만큼이나 순수했다. 그러나 그 반지는 끝내 전해지지 못했다.

장례식 날, 아이 손에 쥐어 있던 그 반지를 관 옆에 조심스럽게 놓아주었다.

어린 손으로 고른 문방구 반지 하나가, 그렇게 마지막 인사가 되어버렸다.

지금도 나는 그 반지가 동생의 무덤 어딘가에 그대로 있을 것이라 믿는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그날 밤, 억수 같은 장대비가 쏟아졌다. 어머니는 쉽게 잠들지 못하시고 떠난 자식생각에 실성하고 울고 또 우셨다.

비가 너무 와서 무덤이 훼손될까 염려되셨던 것이다.

집에 있던 비닐포장을 챙겼지만, 밤중에 나 혼자 산속으로 들어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결국 면 단위에서 개인택시를 하던 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정을 말하고 도움을 청했다.

묘지와 가장 가까운 임도에

택시를 세워두고 상향등을 밝히 켠 채, 기사와 내가 함께 산길을 올라 동생의 묘에 이르렀다.

비닐포장을 덮어주며 말없이 흙을 다독였다. 그 침묵 속에는 남동생을 먼저 보내야 했던 형의 마음 아픈

괴로움이다ㆍ

1997년 4월, 그 밤의 비와 어둠, 택시 불빛 아래 서 있던 동생의 묘는 지금도 내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세월은 흘렀지만, 동생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유독 나와 아내를 잘 따르던 사람,

조카들을 자기 자식처럼 품어주던 사람이라서 더 그렇다.

가끔 묘 앞에 서면,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동생 금채야, 너의 어린 조카들이 문방구에서 골라 사다준 그 반지는 아직도 손가락에 잘 끼고 디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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