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프로그램
토요일 아침은 평일과는 다른 결의 공기가 흐른다. 평생을 몸담았던 온라인 게임을 떠나고, 또 다른 인생의 막을 열어 행정사 사무실로 종종 출근하는 평일의 긴장감에서 벗어나는 시간.
하지만 수십 년간 몸에 밴 규칙적인 습관은 주말이라고 해서 나를 늦잠의 유혹에 가두지 않는다. 어김없이 눈을 떠 가벼운 차림으로 안양천 변이나 집 주변의 숲길을 걸으며 아침 운동을 마친다. 상쾌하게 땀을 흘리고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마친 후, 시계를 보면 정확히 아침 8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가 바로 나의 오랜 토요일 아침 동반자였던 KBS의 <시니어 토크쇼 황금연못>이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리모컨을 눌러 채널을 고정하고 텔레비전 앞에 앉으면, 그곳에는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온, 혹은 나보다 조금 더 앞서 험난한 세월을 헤쳐온 우리 시대의 얼굴들이 가득했다.
그분들이 풀어놓는 한 마디 한 마디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자식들을 키워낸 이야기, 황혼의 나이에 마주하는 부부간의 소소한 갈등과 화해, 그리고 나이 들어감에 따라 느끼는 쓸쓸함과 그 안에서 피어나는 작은 행복들까지.
방송을 보는 내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마치 고향 동네 평상에 앉아 이웃들과 도란도란 정담을 나누는 듯한 푸근함이 그곳에 있었다.
그런데 여느 때와 다름없이 운동을 마치고 돌아와 설레는 마음으로 텔레비전을 켰던 어느 토요일, 화면 속에는 낯선 프로그램이 흐르고 있었다.
채널을 잘못 맞추었나 싶어 몇 번을 확인해 보았지만, 내가 찾던 정겨운 얼굴들은 보이지 않았다. 577회라는 긴 시간 동안 주말 아침을 지켜오던 프로그램이 소리소문도 없이 막을 내렸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가슴 한구석이 툭 하고 내려앉는 듯한 허전함이 밀려왔다. 참으로 아쉽고, 또 아쉬운 일이다.
우리 시니어 세대들은 눈을 어지럽히는 화려한 연속극이나 귀를 멍하게 하는 자극적인 음악 예능에 그리 마음이 가지 않는다.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은 거창한 허구가 아니라,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현실과 맞닿아 있는 삶의 풍경이다.
땀 흘려 가꾼 투박한 농촌의 밭자락, 자연의 품에서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순수한 이들의 일상, 그리고 인생의 모진 풍파를 견뎌낸 이들의 꾸밈없는 목소리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큰 위로를 준다.
세련되게 포장되지 않았어도, 그 거친 손마디와 깊은 주름살 속에 담긴 진짜 인생의 향기가 좋았던 것이다.
황금연못은 단순한 방송 프로그램 이상이었다.
그것은 소외되기 쉬운 노년의 삶을 슬롯의 중심부로 끌어올려 그 가치를 인정해 주는 따뜻한 아고라였고, 젊은 세대에게는 부모 세대를 이해하게 만드는 징검다리였다.
그런 소중한 소통의 창구가 효율성과 개편이라는 이름 아래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것은,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노년층 모두의 이야기를 잃어버린 것과 다름없다.
주말 아침, 정성껏 내린 따뜻한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빈 화면을 바라본다. 비록 지금은 황금연못의 물줄기가 잠시 멈추었지만, 시니어들이 마음을 터놓고 웃고 울 수 있는 공간은 반드시 다시 마련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굴곡진 현대사를 온몸으로 지탱해 온 이들의 지혜와 경험은 우리 슬롯가 계속해서 귀를 기울여야 할 보배이기 때문이다.
소박하지만 진실했던 그 아침의 아늑함이 그리워지는 주말이다.
언제고 다시, 우리 세대의 눈높이에서 인생을 노래하고 자연을 담아내는 순수한 프로그램이 우리 곁을 찾아와 주기를, 그리하여 다시금 토요일 아침의 걸음걸이가 더욱 가벼워질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려 본다.